앞선 글<본지 9월 26일자 15면 참조>에서 교회의 위기가 중심을 잃은 외형적 성장과 권력지향화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교회가 세상에 희망과 생명을 분여하고 구원의 센터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알짬에 근거한 성장과 본질지향화로 나가야함을 논하였다. 계속해서 교회를 위기로 내모는 두 가지 사항을 더 살펴보고 교회가 이 세대에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비결을 모색해 보자.
셋째로, 오염된 신학과 영성에서 개혁적 영성과 신학으로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말은 ‘다시 형성하다’, ‘새롭게 만들다’, ‘되살리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레포르모(reformo)’에서 나온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기존의 신앙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종교와 교리를 창조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잊어버렸던 것을 되찾아 내는 재발견자로서 자신을 기억했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복음의 재발견’에서 출발했다.
다시 말해 잊어버린 것은 복음의 정신이었고, 그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려는 실천이었다. 그 정신과 실천은 단 한 번이 아닌 언제나 개혁하려는 마음과 실천을 요구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표어가 “개혁된 교회는 언제나 개혁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개혁’은 현재진행형으로서 부단히, 때로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변화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현시대에는 ‘개혁’이 절실하지만, ‘개혁’이라는 말처럼 쉽게 남용되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변화와 혁신에 따른 교회의 변신을 개혁과 혼동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나아가 개혁의 주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허다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닌,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사회보다 앞서 자신을 스스로 개혁하고,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개혁으로부터 벗어난 성역(聖域)이요 무풍지대인 것처럼 여긴다면, 이미 그 교회는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아니요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범람하는 거짓 예배, 위장된 교훈, 잘못된 확신, 그리고 헛된 열심이 사람들로부터 각광받는 요소가 된다고 하더라도 복음의 정신에서 비켜 간 것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비판을 요구한다. 개혁은 무엇보다도 잘못된 구태와 관행에 대한 냉철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자기비판과 개혁에 소홀하거나 그것을 멈추는 교회는 언제든 약화되고 변질될 수 있다. 언제나 개혁하지 않는 교회는 결코 개혁된 교회일 수 없다.
그동안 교회가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강단에서 공식처럼 외치고 있는 동안 제대로 된 믿음이라면 함께 연동해야 하는 ‘실천’은 유실되었다. 여기서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 종교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차고 넘치는 은혜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자연스런 응답으로서 실행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이다.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구원 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동적인(dynamic) 믿음과 실천적(practical) 영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결국 정적(static) 개념 안에 갇힌 채 박제된 믿음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부르심 이후 믿음을 통한 칭의(justification)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이후에 필연적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성화(sanctification)와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롬 6:19, 8:30)은 생략한 ‘반쪽 복음’을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적 오류는 교회 성장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거룩함의 뿌리이며, 거룩한 삶의 첫 걸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의 시작이자 거룩한 삶을 이어가는 비밀이다. 이제 교회는 이 땅에서 두렵고 떨림 가운데 이루어가는 구원(빌 2:12)의 온고잉(ongoing) 프로세서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행함으로 응답할 수 있는 성숙한 크리스천들을 양육해야 할 것이다.
현재 북미주지역뿐만 한국 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강과 부’의 복음과 ‘번영의 신학’은 부와 건강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지표로 내세운다. 따라서 번영의 신학을 외치는 목회자들은 품었던 삶의 야망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가장 순수한 증거라 하였다. 그렇다고 루터는 하나님 믿는 삶이 성공과는 반대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루터는 신앙의 기본자세가 바로 ‘죽음과 낮아짐’ 그 자체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의 최고봉은 그가 가장 낮아지고 처절하게 죽었던 십자가의 근저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설의 진리를 배제하고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대로 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야성적 영성을 상실할 때 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이미 탈선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세기 교회는 20세기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경건주의의 사조에서 이탈하여 이기적인 믿음과 신자유주의 질서로의 편승, 탐욕, 무관심 등에 휩쓸려 위기 상황에 처했다고 진단해 본다.
마지막으로 무너져가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복원하라
현대교회의 거룩한 공동체성이 저급한 세속 문화와 그 가치의 급속한 확산과 침투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 아울러 전통적 가치에 대한 도전, 종교다원적인 환경의 심화, 가정의 해체, 동성애의 확산, 교회의 대형화로 인해 성과 계층과 인종을 초월하여 복음으로 하나 되어야할 가족이라는 교회의 공동체성이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었던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실천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허공을 맴돌 뿐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 교회 바깥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실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교회 안팎의 지극히 작은 자(마 25:40, 45; 눅 15:7)를 소외시키지 않고 그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토대 위에서 함께 말씀과 밥상과 삶을 나누었던 교회 공동체만이 영적이고 생명적인 관계 위에 세상을 복음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 힘이 충만한 교회이다. 교회가 원자화되고 따뜻한 생명적 관계가 해체될 때, 교회는 세속화되기 십상이고 복음의 정신은 희석된다. 아버지(하나님)와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요 10장)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요 15장)가 암시하듯 영성적 관계를 잃어버릴 때 교회는 약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점점 개인주의화 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갈 수 있는지가 교회 존속과 성장과 부흥의 관건이 될 것이다.
교회의 위기는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속에서도 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위기만으로 보지 않고 각성과 쇄신과 성숙을 위한 기회로 삼는 태도이다. 현대교회가 이전보다 심각하게 세상으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고 내적인 토대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잠재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고, 그 생명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스스로를 혁신하고 거듭나지 않은 채 현재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자연히 반등(反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맹목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전의 구태를 벗어던지고 인습적 지혜와 세속적 가치를 복음적 가치와 희생과 섬김의 정신으로 전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나가는 생명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위기의 교회가 그 위기를 넘어 희망과 생명을 세상에 분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