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기독교는 유다이즘(Judaism) 속에서 탄생하여 헬레니즘 속에서 성장하였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모태는 유대교이다. 그러나 후에는 희랍사상을 바탕으로 그 신학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를 바로 이해하려면 유다이즘과 함께 헬레니즘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배경과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일반인이나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들 더구나 신약학자들 중에도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그런데 한국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와서도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고대희랍사상 특히 고대희랍철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논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살펴 본 다음에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고찰해보기로 한다.
2. Hellenism과 Judaism에 대한 오해들
1) Hellenism은 다신론적이고 Judaism은 일신론적인가?
한국에 있을 때 당시 한국대학생선교회의 총재이신 김준곤 목사님이 어느 잡지에 쓰신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란 제목의 글을 읽어보았는데, 그 분은 어느 서부극의 제목을 연상시키는 말로 그 글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 하셨다: “헤브라이즘은 천국으로, 헬레니즘은 지옥으로”라고 말이다. 이로써 그 분은 헤브라이즘을 찬양하고 헬레니즘은 저주한 셈인데, 그 이유는 헤브라이즘은 신본주의(theocentric)이고 일신론적(monotheistic)인데 반하여 헬레니즘은 인본주의적(anthrophocentric)이고 다신론적(polytheistic)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분이라면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글을 읽고 필자가 특별히 안타깝게 생각한 이유는 그 분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이 분이 어떤 근거에서 이런 글을 쓰셨는지 필자는 모른다. 그리고 그분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 분이 무슨 뜻으로 이 말들을 사용하셨는지 또한 알 수 없다. 요즈음에는 학자들 간에 Hebraism이란 말을 쓰는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거의 전부가 그 말 대신 Judaism이란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헤브라이즘과 유다이즘이 같은 것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시기적으로 헤브라이즘은 바빌론 포로생활 이전의 유대교 및 유대문화를, 그리고 유다이즘은 그 포로생활 이후의 유대교 및 유대문화를 뜻한다. 이러한 구별은 19세기초에 독일신학자 데 베테(De Wette; 1780-1849)에게서 비롯되었다. 유대교를 이처럼 바빌론포로를 분기점으로 헤브라이즘과 유다이즘으로 나눌 경우 전자의 창시자는 모세이고, 후자의 창시자는 에스라라고 흔히 말해진다. 헤브라이즘이건 유다이즘이건 엄밀한 의미에서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고 모세와 에스라는 하나님의 종들 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헬레니즘이 인본주의이고 다신론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고대희랍은 여러 개의 폴리스(π?λι?; polis)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폴리스를 흔히 도시국가(city state)라고 번역하는데, 이 번역이 그리 적합한 것은 아니다. 폴리스 하나 하나가 주권을 갖춘 국가이긴 하지만 규모가 도시처럼 작다고 해서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들이 대형화되어 희랍전체 인구보다 많은 도시들도 있어 요즈음 같으면 차라리 “마을국가(village state)”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폴리스들의 가장 큰 특색은 그것들이 종교적인 공동체(religious community)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시국가가 존속하는 한 계속되었다. 희랍본토가 비좁고 척박한 곳이 많아 주전 7-5세기엔 많은 고대희랍인들이 지중해연안 여러 곳으로 이민을 가서 폴리스를 세웠는데, 그 때 그들이 제일 먼저 세운 것은 신전, 그리고 학교와 체력단련을 위한 김나지움(gymnasium)의 순서였다. 그리고 크고 작고 간에 그리고 공사 간에 어떤 행사를 할 때는 반드시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5세기 후반에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인본주의가 젊은이들 사이에 침투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국한하였다. 따라서 헬레니즘을 인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고대사회가 종교적이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신본주의였다는 사실은 비단 고대 이스라엘이나 희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고대국가에 공통적인 특징이다. 다시 말해 종교와 사회 또는 종교와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몰트만의 말을 빌자면 “신들이 없는 국가도 없고 국가 없는 신들도 없었다.”(There were no godless states, no stateless gods.)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고대사회나 민족이 신본주의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신관을 가졌으며, 그 신관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모든 이방국가들이 그랬듯이 희랍의 경우 민간인들은 소위 올림포스의 신들이 주축이 된 다신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소피스트들을 비롯해서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신들을 거의 믿지 않았다. 철학자들의 경우 특히 후세에 그리고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철학 자들의 경우 그들의 신관은 다신론이라기보다는 일신론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헬레니즘을 어떤 시대나 학파간의 구별 없이 다신론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사람 또는 유대인들의 신앙은 항상 신본주의이고 일신론적이었는가? 우선 그들이 항상 일신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를 고찰해보자. 물론 구약성경은 야웨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야웨만을 신으로 모신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이스라엘백성에게 있어서의 일신론신적 신앙은 상당히 후대에 이르러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우선 야곱이 그의 삼촌 라반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그 부인들이 이방 신들의 상들을 가지고 나온 사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점을 친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종살이 할 때 이방 신들을 섬긴 것 등은 그만두고라도 애급에서 나온 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40 일 간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출애급 한 뒤에도 여전히 이방 신들을 섬긴 사실을 말해준다. 이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 먹으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백성을 가르친 후에도 여전히 이방 신들을 섬겼다는 사실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급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라고 수24:14에서 말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그때까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다면 이 말은 의미 없는 말이 될 것이다. 여호수아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에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이것은 그 때까지 이들이 이방 신들을 섬겼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24:31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이와 같은 말이 삿2:7 절에도 나온다. 이 말은 여호수아와 그 세대들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이방 신들을 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삿2:10-11에 보면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라고 되어있다. 그 이후의 사사기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벌을 받아 이방인들의 압제를 받게 되고 그 압제가 심하게 되면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어 사사를 보내어 구원해주시면 얼마 안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시 이방 신들을 섬긴 사실이 반복되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신들을 섬긴 것은 사사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왕국이 세워진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아니하였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솔로몬이 이방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고 그 후 북방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그리고 남방 유대가 바빌론에 망한 것도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분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다. 북방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망한 후에 열왕기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7:7-12):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규례를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만히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저의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며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치 말라 명하신 일이라.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많은 학자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국한 뒤로는 오직 야웨 하나님 한 분만 섬기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고대희랍의 역사와 로마의 역사뿐만 아니라 헬레니스틱시대의 유대사(Hellenistic Jewish History)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유대인 학자 비커만(Bickerman)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육의 목적으로 포로생활에 갇혀있었으며, 이 경험은 주님의 경배자들로 하여금 이방종교의 간음을 영원히 버리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빌론포로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야웨 하나님과 함께 다른 이방 신들도 섬겼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1932년에 발굴된 주후 약 3 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두라 에우로포스(Dura Europos)의 회당의 마루바닥에는 이방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벽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까지도 인근의 희랍신전에서 볼 수 있는 신화적 인물들과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이 알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이 회당이 이스라엘 본토가 아니라 디아스포라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예외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토에 세워진 회당들에서도 이방 신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황도대(zodiac)와 호머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장면의 묘사까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시기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이방 신들을 섬겼음을 암시해주는 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본토 밖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과 함께 다른 이방 신들도 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본토밖에 세워졌던 다른 성전들의 발굴에서도 나타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헬레니스틱 시대에 이르러 귀신숭배(demon worship)와 마술이 이스라엘백성들 중에 크게 성행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