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환
(Photo : 기독일보) 최윤환 목사.

짙은 구름 사이사이 엷게 가라앉는 안개 내리고
포토맥 강 위로 린컨 브릿지 교각에 덮어 오는 저녁 그림자
구름과 안개 사이로 비집고 들어 서 보면 어떨까

아까운 발길을 모았던 2012의 프라하의 까롤 다리가
마음 얼굴에 겹쳐 비쳐 올라와
그 때 시대, 그렇게 프라하를 아꼈던 <빈> 의 모차르트, 그리고
프라하 産 '드보르작' 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앞에
컨써트 홀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매처럼 솟아오르는 몸짓으로 지휘봉을 던져, 펴내는 이 프라하 産 '야콥 흐룻사'
짧은 지휘봉을 손바닥 안으로 잡아채며
강한 절도를 휘날리는데
악곡 표를 낚아채려는 듯이, 지휘대 바닥까지 뒤 흔들릴 때
오케스트라 온 전원 화음이 지휘봉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패기일까
교향곡 25번이 모차르트의 절묘한 美音曲으로 저리 활기의 날개 펴내는
린컨 컨써드 홀의 황홀경이라 해도 누가 뭐랄 사람 있을까

차츰 매는 알 듯 모를 듯 사이에 떠오르는 독수리로 變形되어
샛 하얀 귀재의 가면 덮은 얼굴로 드라큘라처럼 검정 公服을 흔들며
그 얼굴보다 작게 보이는 바이올린을 커다란 빨간 입 아래의 턱 안에 끼워
요정처럼 실눈으로 매섭게, 비음을 비트는 프라하 특유의 음색으로 펴 낼 때
드보르작의 바이올린 현 위 아래 쪽 오르내려 휘 둘르며
흘려 내고 있는 心眼이 표출되는 '어거스틴 헤델릭'

그 사이, 매 독수리는 두 날개를 활짝 열어서
차츰 성난 파도 휘몰아쳐 다가오는, 해일(海溢) 앞에
바다바위를 뒤 흔들어 놓는, 대북소리

손아귀 안으로 녹여 내리게 하는 칸타타 화음에 싸여,
바다의 혼령이 아름다운 음색을 휘졌는데,
노도의 파도를 점차 갈아 앉혀 놓고야 마는
매 독수리 지휘는 드디어 오므려 뜨려놓으려는, 큰 두 팔의 모아짐..

앙코르에 지긋이 나타 나와서는 또
현의 한 올 마저 끊어뜨리며, 휘날리게 휘두르다가
기운 다, 진해지듯이 가늘어지는 音波

너무나 요란스럽다 못해 차라리
허름하게 흘러가는 여기 소란스러움 속이라고나 할까,
짐 짓 잠들어버림 같은 세상으로 살아가게 하는
오늘의 세계, 한 角의 모습 앞에 닥아 섬으로 인해
스스로라도 아름답게 맘 잦아들게 하고야 마는
그렇게 발레 무도회장 속 변화무쌍의 音色 되어
들 뜬 무대의 소요(騷擾)를 깨뜨리고
想像의 내일로의 꿈을 그대로 다듬으려, 마음 재운다.

그 날 저녁, 6월 7일 2013년, 작은 속력으로 저녁 길 위로 미끄러뜨릴 때, 포토맥의 검회색구름안개는 온 하늘을 짙게 휘덮고, 동 쪽의 강 끝자락으로는 구름 속을 가로지르는 가는 해 그림자 줄기가 아직 아주 길고 가늘게 은색줄기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보통 때처럼 컨써트 홀로 붉은 카펫을 밟고 내 자리를 찾아 몸 쏟아놓듯 의자에 묻었습니다. 젊은 지휘자가 성큼성큼 오케스트라 사이를 질러 나와 지휘대 앞에 서서 웃음 띠고 잠깐 머리 숙여 인사한 후 돌아서서 지휘봉을 내 던지듯, 차츰 느닷없이 휘두르는데, 정신이 휘쩍 튀도록 젊은 끼가 솟아 넘쳐, 2시간 반의 청중을 몰아갔습니다. 지나간 세기의 천재 모차르트의 音을 따라, 프라하 産, 여기 젊은 이 지휘자는 체코슬로바키아 동유럽의 특유의 분위기를 펼쳐 터뜨리며 저 발랄함 속의 유연함을 묻혀 흘리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곡 바이오린 협주곡의 연주자도 몸집 큰 검은, 상하 公服에 하얀 커다란 얼굴, 유난히 붉은 큰 입 아래에 다 밀착시킨 바이올린이 너무나 작게 보였습니다. 미안하지만, 化粧해 차려입은 드라큘라가 훌렁훌렁 걸어 나오나 싶었습니다. 드보르작의 바이오린 연주에서는 귀재였습니다. 특히 박수갈채로 다시 등장한 연주자는 아예 활줄이 끊겨 진 채로, 유연히 흔드는 아름다운 스타카토에 온 천중의 감동의 머리를 흔들게 하였습니다.

끝으로 프로코피에프의 칸타타는 성난 바다의 몰아치는 파도처럼 대북과 오케스트라에 플룻이 온 무대를 강. 약으로 몰아쳐주고 그리고 200명 가까이의 대 합창 아래에, 청중에게 취한 감동으로 잠재워 주었습니다. 인간의, 특히 예술 속의, 더더욱 음악의 美音 깊이 속에는 더없는 감동의 예리함이 끝 갈데없는 내심 속으로 파고들어 가주게 합니다. 사실 인간의 능력이 닿지 못하는, 인간 개인 속 심리 깊은 심층을, 어떤 손길로 닿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요! 더더구나 그 개개인의 내심 심층 속을 말입니다. 길면 길다고도 할 인간 생애를 통하여, 굴곡의 진통을 통과해 나온 고백 깊이로, 神의 심연(深淵)만이, 이런 개개인 삶의 심층 아래의 삶의 작은 희열뿐만이 아니라, 더 깊은 질고의 아픔 속에까지도 닿을 수 있다 함을, 音으로 호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려니 다짐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