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관식  시애틀 형제교회 원로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심관식 시애틀 형제교회 원로 목사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 많이 달라져 갑니다. 도시마다 건물들은 높아져 가는데 사람의 인격적인 면은 자꾸 작아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동서 사방으로 다니는 고속도로는 얼마나 과거에 비해서 넓어졌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보는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옛날에 비해서 얼마나 소비는 많아졌습니까? 그러나 삶은 더 가난해 지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을 보면 참으로 만족할 것 같은데 기쁨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실감합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작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궁궐 같은 집에서 사는 것 같은데 가족은 더 적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자동차를 타고 부지런히 왕래하는데 시간은 더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많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서 학력은 높아졌지만 예절을 비롯한 버릇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울러 지식은 많아졌지만 바로 결정하는 판단력은 비정상일 때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우리 사회 주변에 문제는 더 많아져 가는 실상을 보지 않습니까? 오늘 날에는 별의 별 약이 다 있고 계속 개발 되지만 사람들의 건강은 더 나빠져 갑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사는데 너무 웃음이 적어서 삭막해져 가는 느낌을 갖습니다.

해외를 여행하다 보면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현지 종업원들이 한인 인줄 알고 약간 비아냥하는 말투로 "빨리 빨리"하고 흉내를 냅니다. 여기에 연관하여 볼 때 사람들이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내는 이들을 봅니다. 일반적으로 옛날에 비해서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모든 것의 가치는 더 줄어들었습니다. 말은 너무 많이 하는데 실천은 별로 없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심이 야박해져서 사랑은 적게 하면서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합니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우는데 실상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좋은 약과 치료 덕으로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신간 속에 삶의 큰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한 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개발하여 멀고 먼 달에는 갔다 왔지만 가까운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 졌습니다.

외계를 정복했다고 하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 분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하고 살아갑니다. 여러 가지 유혹은 더 늘어 가지만, 정의의 열정은 점점 더 줄어들어 갑니다. 현대인의 생활 속에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식품 관리로 키는 커졌지만 사람들의 인품은 왜소해지고, 모든 면의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인간관계는 더 나빠졌습니다. 여러 교통 면에서 더 빨라진 고속 철도나 더 편리한 일회용 용품들이 더 많은 광고와 전단을 뿌리지마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더 양심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양심을 잃고 사는 것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옳지 않은 허식으로 겉을 꾸미고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큰 탈인데 그런 사람일수록 태연자약합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에 중 한 사람이 동리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시주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이웃집 사람이 예수 믿는 집은 시주를 안 준다는 말을 알고는 중이 꽹과리를 두들기면서"시주 좀 하세요."하니까 그때 안에서 나온 주인이 "우리 예수 믿어요." 물론 예수 안 믿습니다. 하니 또 중이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다니지만 내가 진짜 중인 줄 아세요? 그저 이렇게 하고 다녀야 잘 주니까, 이렇게 중의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지요." 두 사람은 완전히 양심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특별히 불행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해마다 무슨 태풍, 무슨 재해(災害)라고 해서 집과 재물을 떠내 보내고 애태우는 사람들입니까? 물론 그들이 일시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둔 밤길에서 집이 없어 엄마 찾으며 헤매는 고아입니까? 한 때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로 정처 없이 다니는 걸인입니까? 물론 불행한 사람입니다. 육신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보다도 영원히 불쌍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 함정에 빠져 가는데, 자신이 빠져 가는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즉 자기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잃어진 소집 품을 찾으려 애를 씁니다. 잃어진 지갑, 잃어진 우산, 잃어진 볼 포인트 펜, 잃어진 핸드백이나 가방을 찾으려 하는데;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은 죄에 휩싸여 잃어진 채 있는데 전혀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잃어진 가장 귀한 영혼을 찾아 주시려고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종된 자아를 찾아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잊어진 것들을 찾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만병의 의원으로 대수술에 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는 나를 고쳐서 바른 사람을 만들어 주십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해결자인 예수님께 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영원을 갈망하며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눈가림으로 적당히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의 일곱 귀신 들린 아주 흉악한 만신창이가 된 여인의 상태를 보시고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나약한 마음으로 밤에 찾아 나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 뜻이 통하지 않았으나 그 가려진 것을 벗겨 주시매 요한복음 19:38-42에 있는 대로 큰 변화를 받아 예수님의 시체를 안장까지 하였습니다.

잊어버리고 사는 인간에게 바른 정체성을 찾아 주시는 예수님께 모든 인류는 다 나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