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의 혼돈 시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가 그립다!(느 1:1-11)

혼돈이 극에 달한 시대

오늘날 우리 시대는 겉으로 보면 반만 년 역사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우리 민족이 과연 언제 이같은 풍요를 누렸던 적이 있었던가! 지난 세기 어떤 부자와 임금도 누리지 못한 풍요를 우리 민족은 지금 누리고 있다. 넘치는 먹거리와 가전품들과 디지털 문화, 그리고 거리마다 넘쳐나는 자동차들! 우리는 지금 중고차 시장가서 수십만원만 주면 조선 마지막 임금이 타던 승용차보다도 더 성능 좋은 승용차를 끌고 5천 년 역사 최고의 포장도로를 신나게 달릴 수 있다. 조선의 임금들도 결코 누리지 못하던 온갖 과일과 음료와 전자제품과 디지털의 도움을 받고 산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외적 풍요 속에 무언가 극도의 혼돈과 빈곤과 아픔 속에 갇혀 있음을 금세 깨닫는다. 대충 살펴보아도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한 종말, 도지사, 시장, 경찰간부, 판사, 육사 교장 심지어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조건(외모, 인기, 물질 등)을 지닌 최고 인기 연예인들의 연이은 불행(자살) 속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풍요는커녕 지금 내적으로는 대혼돈과 혼란의 큰 짐을 지고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이 작금의 시대상이다.

정말 참된 지도자 보기가 쉽지 않다. 영웅이 사라지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는 시대이다. 정말 참된 지도자가 그립다. 이 혼돈의 시대, 과연 어떤 지도자가 나와야 할까? 우리는 느헤미야에게서 혼돈의 시대를 바로 세우는 참 신앙의 지도자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첫째 그는 비극의 시대를 거쳐온 유대출신 바벨론 포로의 아들이었다. 느헤미야는 결코 배경 좋은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 출신 부모를 둔 종이요 노예의 아들이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형통한 자였다. 느헤미야는 형통한 자의 모델이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 또는 “위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위로하신 복된 사람이었다! 도대체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형통한 자가 되었는가? 성경은 느헤미야를 왕의 술 관원으로 소개한다(느 1: 11)! 술 관원은 당시 최고위급 관리였다. 어떤 통치자든 술 맡은 관원은 아주 가까운 심복을 세우는 법이다. 독살의 위험성 때문이다. 외경 <토빗>에 보면 앗시리아(앗수르) 에살핫돈왕의 술 맡은 관원은 앗시리아의 제 2인자라고 말하고 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그런 높은 직위가 가능하였을까?

남북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무너뜨린 나라는 앗수르였다.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그 자리를 넘긴다. 바벨론 다음에 중동 지방에 나타난 초 강대국은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 왕의 주요 계보를 간략히 살펴보자. 고레스 왕(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한 왕) 다음은 캄비세스(술 맡은 관원을 친한 친구 아들을 세움)였고 다리오 1세(오늘날 유명한 마라톤 경기의 원조가 된 그리이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왕 = 에스더 왕비의 시아버지) 다음은 아하수에로(역사상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한 왕)였다. 그가 바로 에스더의 남편이 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아주 가까운 측근에게 살해를 당한다. 그 아들 아닥사스다 왕은 아버지의 피살로 왕위에 오른다. 당연히 그는 측근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갖고 왕이 된다. 술 맡은 관원이야말로 최측근 중에 최측근이어야만 했다. 이방인임에도 느헤미야는 가장 믿을만한 인물로 술 맡은 관원이 되었다. 느헤미야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아닥사스다 왕의 계모가 바로 에스더였다! 에스더 왕비의 보호와 영향 아래에서 유대인들은 자유를 누리고 신앙 부흥을 이루었다. 에스더의 믿음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느헤미야같은 출세한 고위 관리도 나올 수 있도록 예비하신 것이다! 이제 이 형통한 인물 느헤미야라는 인물을 좀 더 살펴보자.

성경이 말하는 느헤미야

첫째 느헤미야는 신앙적 열정을 품은 자였다(느 1: 1-4). 예루살렘에 대한 느헤미야의 뜨거운 관심을 보라! 느헤미야가 활약하기 약 1세기 전 페르시아 고레스왕 때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1차 예루살렘 귀환(기원전 537=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놀랍게도 예루살렘 망한지 꼭 70년 만에 귀환!)이 있었다. 2차 귀환은 학사 에스라(주전 458년)의 주도 아래 귀환한다. 그리고 약 12년이 흐른다. 믿음은 관심이다. 느헤미야는 항상 조국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몸은 바벨론에 있었어도 느헤미야는 믿음의 고향 예루살렘에 대해 관심이 지극했다! 아닥사스다왕 제 20년 기슬르월(11-12월)에 수산궁에서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온 형제 하나니(7:2= 하나니를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 뛰어난 자로 소개/ 아마 느헤미야의 친형제였을 것)에게서 예루살렘의 형편을 묻는다.

자나깨나 느헤미야의 관심은 온통 예루살렘에 있었다. 사랑하면 관심이 쏠린다. 자나깨나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엇인가! 돈, 명예, 출세, 권력, 인터넷, 게임, 교회, 가정, 새예루살렘(천국)? 그게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나깨나 관심을 기울이던 예루살렘에서 참담하고 암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귀환자들이 도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은 훼파당하고 성문은 불타버렸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 지옥의 열기도 불타고 있음을 명심하라!

이스라엘 비극의 책임은 누구인가? 느헤미야의 책임이 아니었다. 느헤미야는 적당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신앙 생활하며 이방 땅에서 출세를 즐기며 살 수 있었다. 느헤미야는 조상이 포로로 잡혀 온 이방 페르시아 땅에서 아주 복되고 형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동포와 조국과 신앙적 열정과 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조국과 예루살렘 성의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며칠 동안이나 주저 앉아 울었다. 하나님은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신다.

두번 째 느헤미야는 영성의 사람이었다(느 1: 4 후반 절-11절). 신앙의 영성과 열정은 간절한 기도로 나타난다. 느헤미야는 슬퍼하며 수 일을 금식하며 회개하였다. 금식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적 태도이다. 사 58장을 보면 참된 금식은 자신의 유익과 형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금식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이웃을 위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환란 당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위한 금식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급속하게 치유하시고 응답하신다.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간절한 기도를 시작한다! 위대한 선지자 다니엘과 많이 닮은 모습이다(단 9:4)! 5절에 나타난 간절함을 보라! 나와 내 가족의 형통을 위해 부르짖고 금식하는 우리들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와 관련되어 있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과 민족의 죄를 철저히 통회 자복하라! 참된 참회와 회개가 따라야 한다. 창조를 믿는 기독교에 우연이란 절대 없다. 지난 2007년 미국 학교 역사상 최대 충격적 총격 사건으로 기록된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살해 사건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교회에 주시는 심각한 경고장이다. 버지니아 참사는 한 외로운 유학생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미국과 우리 민족과 잔인하고 죄 많은 우리 인류 모두에게 주시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느헤미야는 자신과 민족의 죄를 고백하며 참회하였다!

셋째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느헤미야는 무조건 기도하지 않았다.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한다(8-9절). 우리 한국인들의 기도는 <무대뽀(?)> 기도가 많다. 느헤미야는 모세에게 내린 말씀대로 기도하였다. 기도는 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기억하다>는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을 기억하다는 뜻이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기억하고 회복을 간구하였다! 여기서 말씀은 레 26: 14-45절(불순종 경고)과 신 30: 1-5절(순종에 따른 회복)을 암시한다! 범죄하면 너희들을 흩을 것이요 순종하면 회복될 것이다! 6/25 직전 장로교는 해방 직후 엄청난 분열상이 있었다. 평양에서 총회 도중 목사, 장로들이 거룩한 성찬상을 뒤엎는 난장판을 벌였다! 거룩과 성결은 사라지고 교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뒤덮였다. 6/25 주일 새벽 우리 민족은 큰 참화와 슬픔을 당하였다. 필자의 바로 위 갓난 누님도 피난길에 그만 생을 마감하였다.

느헤미야의 기도소리를 보라! 느헤미야는 간절히 도움을 청한다(10-11절)! 종의 기도와 주를 경외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세속의 지도자(아닥사스다 왕)를 위한 기도도 잊지 않는다. 주님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 받게 하옵소서!

나가면서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가 그립다! 느헤미야는 다니엘이나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의 장로격인 사람이다! 느헤미야는 행운아였다! 비록 끌려온 포로요 노예였던 유대 후손의 자녀였으나 일백 년 전 다니엘 그리고 에스더, 스룹바벨, 에스라 같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영향 아래에서 영적으로 세속적으로 형통한 사람이었다! 시련을 믿음으로 승화시킨 지도자가 그립다.

시대의 짐을 지려는 신앙의 지도자가 그립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지고 가야 할 하나님이 주시는 시대적 짐을 기꺼이 지려는 지도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적 형통함을 삶의 최종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 반대였다. 이제 그는 그 세속적 형통함을 내려놓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삶의 중심은 결코 세속적 형통함에 있는 게 아니었다. 느헤미야는 시대 속에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찾고 있다. 언제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자기가 지고갈 시대적 짐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마치 예수님이 죄짐을 맡으신 것처럼!

우리 시대의 느헤미야는 어디 있을까? 지금 우리 민족은 복된 시기를 맞고 있다! 많은 신앙의 선조 덕분으로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제 우리를 되돌아보고 다시 한 번 결단할 시점을 맞고 있다! 지금 이 시대가 진정 복 된 시대가 맞긴 맞는가? 느헤미야처럼 모든 이 민족의 혼돈과 방황과 죄악을 참회하며 다시 결단할 시점은 아닌가! 하나님은 신앙적 열정과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를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쓰셨다. 아! 우리 시대의 느헤미야여!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