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가 약 50미터에 달하고 캐나다 쪽과 미국 쪽을 합한 총 너비가 800미터 이상인 나이아가라 폭포는 매분 370만 세제곱미터라는 엄청난 양의 물이 떨어지는 장관을 이룹니다. 이 때문인지 이로쿼이 인디언들은 이 폭포를 “물벼락”을 뜻하는 나이아가라라고 불렀습니다.
1859년 프랑스 곡예사 찰스 블론딘은 팽팽한 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양편을 횡단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줄에서 떨어지면 즉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참으로 강철 같은 담력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여러 번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넜습니다. 한 번은 눈을 가리고, 또 한 번은 죽마를 타고 건넌 적도 있습니다.
물론 블론딘 묘기의 극치는 다른 사람을 업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이 묘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업혀가는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폭포 위에 매달린 줄을 타고 800미터 이상을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건너려면 그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가 블론딘의 묘기 못지않은 감동을 준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신뢰를 갈망하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신뢰에 대해서는 최선의 것으로 보답하고자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신뢰해 주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한 깊이 있는 신뢰가 있을 때 교회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뢰가 바탕을 이루지 못하는 가정은 쉽게 깨집니다.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가정 대부분은 남편과 아내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인격모독으로 비치고 그로인해 부부 간의 삶이 피곤해집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 일입니다. 목사님들이나 오랜 목회 연륜이 있는 분들께 조언을 구할 때마다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절대로 교우들을 믿지 말라.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 말씀은 항상 저에게 부담되어 오는 내용입니다. 정말 믿고 싶고, 신뢰하고 싶은 교우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늘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혼란이 저에게 있습니다. 물론 그 조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신뢰를 언급한 것이라 늘 부담이 되는 조언입니다. 그러나 신뢰에 대한 내용을 묵상할 때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사역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역은 섬기는 것인데 섬김의 대상을 신뢰하지 못하고 어찌 섬길 수 있다는 것인지….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 이은 800여 미터의 팽팽한 줄 위를 걸어갔던 곡예사 찰스 블론딘도 위대하지만, 그를 신뢰하고 그의 등에 업힌 사람은 더 위대한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인간 찰스 블론딘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감히 그런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요? 신뢰했더니 수많은 사람의 탄성을 자아냈던 세기의 곡예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도 ‘신뢰’입니다.
1859년 프랑스 곡예사 찰스 블론딘은 팽팽한 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양편을 횡단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줄에서 떨어지면 즉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참으로 강철 같은 담력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여러 번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넜습니다. 한 번은 눈을 가리고, 또 한 번은 죽마를 타고 건넌 적도 있습니다.
물론 블론딘 묘기의 극치는 다른 사람을 업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이 묘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업혀가는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폭포 위에 매달린 줄을 타고 800미터 이상을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건너려면 그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가 블론딘의 묘기 못지않은 감동을 준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신뢰를 갈망하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신뢰에 대해서는 최선의 것으로 보답하고자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신뢰해 주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한 깊이 있는 신뢰가 있을 때 교회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뢰가 바탕을 이루지 못하는 가정은 쉽게 깨집니다.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가정 대부분은 남편과 아내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인격모독으로 비치고 그로인해 부부 간의 삶이 피곤해집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 일입니다. 목사님들이나 오랜 목회 연륜이 있는 분들께 조언을 구할 때마다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절대로 교우들을 믿지 말라.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 말씀은 항상 저에게 부담되어 오는 내용입니다. 정말 믿고 싶고, 신뢰하고 싶은 교우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늘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혼란이 저에게 있습니다. 물론 그 조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신뢰를 언급한 것이라 늘 부담이 되는 조언입니다. 그러나 신뢰에 대한 내용을 묵상할 때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사역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역은 섬기는 것인데 섬김의 대상을 신뢰하지 못하고 어찌 섬길 수 있다는 것인지….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 이은 800여 미터의 팽팽한 줄 위를 걸어갔던 곡예사 찰스 블론딘도 위대하지만, 그를 신뢰하고 그의 등에 업힌 사람은 더 위대한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인간 찰스 블론딘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감히 그런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요? 신뢰했더니 수많은 사람의 탄성을 자아냈던 세기의 곡예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도 ‘신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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