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기간 중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자인 릭 샌토롬에 의해 격발되었던 논쟁 가운데 지난달 있었던 시시한 싸움이 있었다. 그것은 보수적인 청소년들이 고등교육을 통해 받는 독에 관한 것이었다.

샌토롬은 티파티 청중들 앞에서 오바마 대통령 같은 “속물들”이 대학을 압박하는 한가지 이유는 유연한 보수주의적 사고방식을 보다 자유주의적(liberal)인 것으로 “개조”하려는 것 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오바마는 펜실바니아 주지사였던 그에게 “블루라익재즈(Blue Like Jazz)” 영화표라도 하나 사서 보내줄 법도 하다.

새로 나온 이 영화는 텍사스 출신의 독실한 남침례교신자가 오레건주 포트랜드에 있는 과격하게 자유주의적이라 폴리티컬 코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인 정답’으로 직역되나 여성 운동이나 공공장소에서 기독교를 강요하는듯한 표현을 금지하는 주의 주장이나 정책을 말함)의 본산이라고 알려져 있는 ‘리드대학’에 입학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도서부문 베스트셀러가 된 도날드 밀러의 책에 기초한 “블루라익재즈”는 보수주의자들이 대학에 대해 조금도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듯 하다. 맥주와 레즈비안 아가씨와 어중되게 골탕먹이는 것들의 세례식을 한차례 치른 뒤 대학생이 된 복음주의자 주인공은 과연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믿음이 정말로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문화와 대조적인 자신의 모습을 비추면서다.

2006년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로 이 책이 떠올랐을 무렵 책을 읽고난 후 3년 간 입소문으로 책이 팔려나간 걸 아는 독자라면 이 책 내용을 영화화 한다는 발상에 뒷머리를 긁적거릴지도 모른다.

밀러가 리드대학에서 경험한 내용들은 이야기식보다 묵상식으로 스쳐가듯 회상하는 가운데 하나씩 펼쳐졌다.

리드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줄거리 가운데는 좀 과장된 장면들이 나온다. 성직자들의 성적학대 대상이 된 인물들과 좀 모자라는 청년부 사역자들, 교회 여성도들의 좋지 못한 행동을 본 단 밀러 자신의 배경설명이 새로 등장하는 것 등인데 이런 것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청소년 관람객들을 영화관으로 이끄는 소재들이다.

종교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블루라익재즈 같은 영화에서 대학캠퍼스를 배경으로 보여주는 부분들이 실제 현실속에서도 복음주의 신자들이 더 흔하게 겪게되는 문화적인 충격을 잘 집어내 다룬 것이다. 릭 샌토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 기독교라는 거품을 빼고 현실속의 세속적인 주류사회가 믿는 거짓 신들과 악마들과 조우하면 할수록 그렇다.

미국대학이 급격히 세속화된 역사는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1960년대부터가 아니다. 1902년에 우드로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총장에 임명된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로교 목사로 위장한 죤 메이나드 케인즈가 반(反)다윈 계열의 교수들을 과학부에서 쫒아내고 신조나 따지는 철학 교수들은 신학부로 보직 발령을 낸 장본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비올라(Biola)와 밥 죤스, 제리 파월의 리버티 대학에 이르기까지 자기들만의 대학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대학 내부에서부터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을 취하는 복음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캠퍼스 내에 기독교 학회 같은 것들을 조성하여 믿음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도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려고 힘쓴다.

복음주의자들이 시골의 아성을 떠나 대거 도시 근처로 이주하고 세속적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들의 자녀들은 교육상 이웃들과 같이 주류 대학을 고른다든지, 법과대학원과 같은 대학원급 이상의 교육을 추구할 경우 소정의 학위를 따는 것 이외의 아무런 신앙상의 티를 나타내지 않고 섞이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릭 샌토롬이 ‘속물’ 운운했던 것은 정치적인 극단론자들이 펴는 주장이 흔히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듯이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어떤 두려움 때문에 상대방을 지나치게 깍아내리려 한 감이 있다.

“블루라익재즈” 영화 속에서 단이란 한 청년이 리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다보면 우회적이고도 극적인 요소에 말려든다. 어머니의 간음사건과 성직자의 위선에 환멸과 상처를 입은 그는 리드대학으로 도망치는데 대학안내서는 그 대학을 “하나님을 믿을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장소”로 소개하고 있다.

대학시절의 하이라이트는 렌페어라 부르는 3일간의 축제 경험이었다. 그 학교 학생이었던 어느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면, “거대하고…또 경우에 따라서는 겁나기까지 하는 하나의 파티”로서 학생들이 몸에 청색 물감 칠을 한 것 외에는 발가벗은 채 돌아다니고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관념을 희생할 각오로 별짓 다하며 벌레까지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단이 여긴 텍사스가 아니야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은 도착한 첫날 남녀공학 기숙사에서 자기가 소변을 보고 있는 옆으로 한 여학생이 다가 와 같이 소변기 앞에 서서 소변을 볼 때부터였다. 그는 곧 함께 어울려 술마시고 춤추고 길가 나무에다 노상방뇨를 한 죄로 체포되는 등 침례교인 부모들이 생각하는 악몽에 가까운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했다. 리드 대학의 치열한 지성주의는 그로 하여금 사랑과 자유를 위해 신앙을 버리도록 유혹했다.

이 영화가 상투적인 기독교 영화라면 구원받는 경험이라든지 2000년 대초에 유행했던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풍자로 끝났을 것이다. 또 기독교 영화산업이 만들어 낸 기존의 이야기들과 같았다면 단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과오를 뉘우치는 식으로 끝난다.

그러나 저자인 밀러와 영화를 감독한 스티브 테일러는 기독교식으로 볼테를의 깡디드 같은 풍자극을 만들어 보다 교묘하게 교훈을 깔아놓다. 물론 둘 다 아주 독실한 복음주의자들이다. 교회에서나 혹은 같이 믿는 교인들로부터 억눌렸거나 혼란을 느꼈고 문자 그대로 학대받았다는 사람들에게 밀러가 다가가 교회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자기에게 고통을 안겨줬던 이들을 용서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공공의 영역에서 복음주의자들의 행동양식이 은밀하다든지 블루라익재즈에서 시험했던 것 같은 유머를 사용하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다. 음악인이자 레코드 라벨 소유자 겸 영화제작사인 테일러는 미국식 소위 경건주의자들을 골탕먹이는 것으로 이골이 난 사람이다. 자기 레코드 앨범에서 텔레에반젤리스트(Televangelists)들이나 러시 림보를 공격하고 폭력을 사주하는 프로라이프(Pro-life) 운동을 비평해왔다.

테일러 역시 세속적인 사회와 기독교 사회 양쪽을 모두 익히 아는 사람이다. 그는 블루스 음악의 주류를 이루는 인사들과 함께 음악을 하며 뮤직텔레비젼(MTV)에 자기 비디오를 올리고 있다. 작년에 글렌 클로우스가 주연한“앨버트 놉스(Albert Nobbs)”같은 비기독교 영화를 고속도로변에 잠시 들려볼 만한 관광지로 개발한 소위 쉬어가는 곳마다 전시할 수 있는 배급권을 따냈던 것 역시 그가 이들 주류사회와 맺고있는 연결 끈 때문이었다.

그런 테일러가 6년 전 “블루라익재즈”를 처음 읽고 안성맞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부제로 붙은 “기독교 영성에 대한 비종교인의 견해”라는 제목이 말하듯 이 책의 비평은 건설적이지만 기탄없는 질책이기도 하다.

밀러는 같은 신앙인들이 은연 중 달고 다니는 도덕적 교만을 이 책을 통해 공격하고 있으며 그런 태도는 복음과는 상치되는 조건적인 사랑으로 귀결되고 만다고 가르친다. 아마도 못되처먹은 밀러식 의견이란 “믿음에는 응답 뿐만 아니라 애매모호함도 같이 관련된다”는 것이다. 제목에 사용된 “재즈”를 본래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가 선언했는데 그 이유가 재즈는 협화음이 아니라는 거였다.

덧붙인다면 그는 본래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하나님이 협화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는 재즈도 하나님도 어쨌든 다 좋아한다고 여운을 풍긴다

밀러가 영화화 해도 좋겠다고 흔쾌히 승락하자 테일러가 봉착한 문제는 3백만부씩이나 팔려나간 책으로 영화를 만든다는데도 제작기금이 태부족인 현실이었다. 지난 달 이 두 사람을 만났을 때 테일러가 그 일을 놓고, “나 원 챙피해서..”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코메디안식의 비탄에 잠긴 모습을 보여주던 밀러에게 혹시 교회들이 당신 책을 안 좋아 해서 모금이 잘 안되는 건 아니냐고 질문했더니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불경기라서 그렇죠. 뭐. 그러나 그것도 맞긴 맞아요”라고 대꾸했었다.

테일러는 모금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묘수를 냈다. 각종 모금을 후원하는 웹사이트로 잘 알려진 킥스타터(Kickstarter)에 이 책의 애독자들이 접속해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 12만 5천불을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30만불 이상이나 걷혔다.

기부자 명단이 영화제작팀의 명단과 함께 상영되는 모습은 이 책을 통한 메시지와 교회의 코드가 맞아떨어진 정도를 똑똑히 각인시켜준 것이다. 명단이 추가로 이어질 때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 속에 동화되어보려고 애쓰는 젊은 기독교인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발견하는 한 군중의 크기를 가늠하게 된다.



<케이아메리칸 포스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