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씨애틀을 비롯한 훼더럴웨이, 타코마 지역의 몇몇 성도들이 혼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 미디어’를 통해 연재된 ‘베리칩’ 관련 기사들과 근래 시중을 떠돌고 있는 몇몇 책자들의 주장 때문입니다. 본 노회는 ‘베리칩’에 관한 그들의 설명이 자신들만의 개인적 주장을 넘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참된 성도들의 믿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아래와 같이 ‘베리칩’에 관한 입장을 밝히는 바입니다.

‘데이빗 차’라는 사람이 쓴 ‘The Final Sign-마지막 신호’라는 책 140쪽에 보면 그들이 ‘베리칩’을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는 이유에 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베리칩은 성경에서 말한 것과 동일하게 모든 사람에게 삽입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는 이 칩을 받지 않으면 물건거래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개인에게 각각 바코드를 부여하는데 그 바코드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666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 정보는 음녀의 상징으로 가득한 EU 본부의 ‘짐승’이라 불리는 슈퍼컴퓨터에 저장 관리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의 주장과 함께 요한계시록 13장 17절의,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는 말씀을 들어,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베리칩’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장래 이 칩의 사용 용도와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말세적 현상간에 서로 상응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설득력 있는 ‘상황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성경을 믿는 참된 교회가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들의 주장에는 상황적 오류가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는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면서 짐승의 권세와 능력을 보고 그를 경배하고 섬기게 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은 먼저 짐승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고 그러한 신앙고백의 대가, 내지는 결과로 매매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4절 이하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하지만 베리칩은 그 어떤 신앙고백적 활동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구원론적 오류 – 1)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참된 성도가 얻은 구원의 영원성을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믿어도 베리칩을 받으면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베리칩이 이식되면 하나님을 조금도 알지 못한 불신자로 전향 되어서 적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기에,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에 여러 차례 그토록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다.”(크리스찬 미디어)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도대체 성경의 어디에서, 예수를 믿어도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2) 또한 예수를 믿어도 베리칩을 받지 않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저들의 주장은 일찍이 바울이 다른 복음으로 정죄했던 거짓 가르침-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별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의지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 없이 외부의 어떤 힘을 인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곧 십자가 피의 공로를 압도하는 사단의 능력을 말하는 이단적 가르침입니다.

셋째) 성경해석학적 오류 - 만약 계시록 13:17의 짐승의 표가 ‘베리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 절 뒤에 언급되는 ‘이마에 쓴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14:1)이 무엇인지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을 쓴 요한이 지금 의도적으로 이 둘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짐승의 표가 무언가를 ‘비유’하는 것이라면 이마에 쓴 이름도 뭔가를 ‘비유’하는 것이 되야 하고 짐승의 표가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마에 쓴 이름도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들은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고만 주장할 뿐 이마에 쓴 어린양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마에 쓴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 그리고 계 7:3의 이마에 인치심,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또 다른 종류의 컴퓨터 칩을 개발하셔서 그것을 그들의 이마에 넣어주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이름과 인(도장)은 공히 소유와 보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마에 쓴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성도들을 자신의 소유로 인치시고 보호하실 것을 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짐승의 표-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기를 구하는 사단의 소유가 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이후, 해석학적 입장에서 ‘666’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습니다. 먼저, 1) 666이란 숫자에 초점을 맞추고 요한 당시에 사용되었던 ‘게마트리아(언어를 숫자로 표시하던 방법)’ 방식에 따라 666을 어떤 개인이나 제국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몇몇 초대교부는 이 방식을 통해 666을 자신들의 신앙을 핍박하는 로마 혹은 네로로 이해하려 했고, 중세의 암흑기를 통과한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666을 교황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모두 역사 가운데 묻혀버렸습니다. 또한 2) 6이란 수가 하나님의 수인 7에 못 미치는 ‘사람의 수’ 혹은 ‘마귀의 수’를 의미한다는 것을 근거로 666을 어떤 개인이나 특정한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하나님처럼 되려는 사람들의 극단적 인본주의, 또 그러한 인본주의를 통하여 말세에 하나님을 대항하려는 사단의 도전으로 해석했습니다.

때때로, 상황의 안경을 쓰고 말씀을 해석하는 일이 전혀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할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상황의 안경을 쓰고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말씀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이해하는 일인 것을 기억합시다. 지금은 깰 때입니다.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깨어있어야 합니까? 복음서는 여러 곳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말세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또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여기 저기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온갖 표징과 기적들로 너희들을 미혹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전한 이 말을 붙들고 이 혼란의 때를 지나야 한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마 24, 막 13, 눅 21장)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며 말씀 앞에 깨어 살아가는 성도라면 베리칩과 같은 세상의 도전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이름은 예수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는 짐승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각각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주 안에서 평안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재미한인예수교장로회(고신) 북서노회 목회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