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두 강도들, 두 운명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왜 하필 두 사람의 행악자가 함께 못 박혔을까? 우연이었을까? 매우 신기한 것은 두 행악자 중에 한 명은 구원을 받았고, 다른 한 명은 저주를 하다가 죽었다. 이 두 명의 운명은 전 인류의 운명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전후의 상황을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비겁한 배반, 부정 그리고 도망감과 예수의 울부짖음을 지적하며 조롱한다. 그들의 태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황에서 끝내 저주를 하다 죽은 행악자와 조롱하고 비웃었던 대제사장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 회개한 행악자의 깨달음의 이유와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깨달은 행악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생의 가장 깊은 고난의 순간에, 십자가 그 악의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참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죽음 직전에 영안이 열려 천사나 혹은 악마를 보면서 환호하거나 공포에 질린 사람을 병원에서 볼 때가 있다. 어쩌면 그는 이와 같이 영안이 열려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 겸손히 간구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을 간구한다. 그것이 다른 행악자와의 차이점이다.

오늘날에도 구원을 받은 많은 사람들 중에는 절체절명의 절망의 순간에 존재의 한계를 깨우치고, 그 한계 끝에서 인식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행악자의 마지막 순간의 구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고,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구원의 정의는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에 있다.

아담의 후예, 십자가의 후예

여기에 아담과의 차이점이 있다. 창세기의 아담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뱀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이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결핍의 자아의식이었다. 물론 이브가 뱀과의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이지만 아담과 이브는 공동 운명체였다. 자신들의 결핍을 알았을 때 그들이 선택한 해결 방법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담은 자신의 결핍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

물론 이브의 선택이었고, 행동이었지만 아담은 이브의 선택을 동조하여 열매를 함께 먹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의 근거가 그들을 유혹한 뱀, 그리고 뱀의 배후에 있던 사탄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아담과 이브가 그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선과 악을 알되 악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었을 때 악을 선택한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하여 질문하실 때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후 선과 악을 알되 악을 행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예레미아서는 말한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예레미아 4:22).

예수님은 원하시기만 한다면 자신의 의지대로 당연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지만 그리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는 좋은 일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므로 악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을 택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어려운 것이었지만 자신에게 쉬운 방법을 포기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때와 방법에 맡기신다.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님의 때와 방법에 맡긴 것, 그리고 순종하는 것 그것을 이 회개한 행악자가 깨달은 것이다.

이 깨달은 행악자는 한때 자신의 결핍을 강도질, 혹은 반로마 혁명을 통하여 채우려 했었다. 이것은 아담의 후예다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그 용서와 구원을 오직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후예, 예수님의 후예의 모습이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 아담도,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것을 이 행악자가 이해하고 행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직면한 죽음의 절대 상황에서 절대 선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한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께 청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누가복음 23:42). 그의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가셨을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고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임하시어 모든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것이다.

그의 간구하는 시제는 가정법 과거의 시점으로 임하셨을 때가 보다 적절한 해석이다. 이것은 당연히 미래의 관점이다. 미래에 임하셨을 때에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요청에 예수님은 오늘이라는 현재형의 복을 선포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있으리라는 미래형 시제지만 그러나 그 미래는 남은 오늘이라는 시점이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낙원의 약속을 받았다. 미래가 아닌 그날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상치 못했던 축복이었다. 기적과 축복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것을 보며, 채움을 받을 때 일어난다. 하나님께는 시간의 요소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음의 요소,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여부가 관건인 것이다. 결론은 제자들의 3년 반보다, 이 행악자의 6시간이 더욱 값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연히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시었고 마지막 순간에 구원할 자를 구원하신다. 구원은 모든 세상적인 것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의 능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오히려 더 절실하고 순전하게 진리를 보게 하고 경험하게 한다. 그 회개한 행악자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구원은 임하고 있다.

이사야 53장의 완성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한 이사야 53장의 완성이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 전 약 650년경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현장에서 기록하듯이 쓰고 있다. 53장 구구절절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언급되는 중 마지막 12절은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맺는다. 예수님께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는 말씀은 십자가 2언을 통하여 완성이 되면서 짝을 찾는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암호 해독법, 즉, 선지자들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구약에서 선포하신 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1언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범죄한 모든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구체적으로 범죄자로 낙인 찍힌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 응답으로 오늘 우리가 있다.

슬프게 행복한 고백
샬롬

제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 버렸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상황으로 인하여
제가 그대에게 가까이 갈 수 없고
그대 또한 제게 가까이 올 수 없지만
그대가 제가 그토록 찾아 헤메였던
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셀라.

그런데 하필 이런 신분으로, 이런 상황에서 그대를 만나다니요.
나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여 저는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 저주받은 운명의 마지막 축복임을 알기에
제 운명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대는 이제 제 시한부 인생의 최고 행복이 되셨습니다, 셀라.

이제 저의 더 이상 펼치지 못할 정도로 펼쳐진 팔은
오직 그대를 향한 것입니다.
제 가혹한 운명으로 하여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발은
그러나 그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대의 펼쳐진 팔로 인해 드러난 그대 가슴은
제 영혼이 달려가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제 다리가 부러질 지라도 달려가
그대의 붉은 발에 감격의 눈물로 입 맞추고 싶지만
저의 피만 헛되이 말라 갈 뿐입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최대의 불행입니다, 셀라.

지금 그대의 펼쳐진 팔이 만든 공간이
저만을 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제 인생 최고의 기쁨입니다.
그대의 못 오시는 두 발의 고통이
저 만을 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제 인생 최대의 슬픔입니다, 셀라.

이렇게 큰 격정으로 그대를 만나고, 바라보고 있지만
그러나 끝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까이 이렇게 있어 슬프게 행복하지만
신분과 격이 다른 당신과의 사랑은
곧 제가 그대로부터 함께 할 수 없는 거리로
멀어져야 하는 절망감에 떨고 있습니다, 셀라.

하여 모든 현기증 속에서라도
제 인생의 마지막 소원으로 감히 그대에게 말할 수 있다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저를 생각하여 주소서… (누가복음 2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