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의 형법 제295조 B항에는 ‘신성모독죄’라는 것이 있다. 알라와 무함마드, 꾸란, 이슬람과 이들의 상징물을 모독하는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최고 사형 혹은 종신형을 선고하도록 되어 있다. 이 법으로 인하여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억울한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으로는 이달 1일 파키스탄 북동부 고즈라(Gojra) 지역에서 코란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50채 이상의 가옥과 한 교회가 불타버리고 이로 인해 7명의 기독교인들이 죽고 19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다고 파키스탄 소수족 담당 연방 장관인 샤흐버즈 바티(Shahbaz Bhatti)는 전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은 꾸란 모독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위한 명분으로 신성모독법이 이용되고 있기에 인구의 1.6%밖에 안 되는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은 언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몰라 항상 불안에 떨며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안와르 마쉬(35)는 파키스탄 라호르 인근의 샤다라에 살고 있었는데 2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2007년 11월 갑자기 해고되었다. 그가 한때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경력이 있다는 것이 해고 이유였다. 그에게는 초드리 나세르라는 기독교인이었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친구가 있었다. 마쉬는 나세르가 턱수염을 기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 말다툼으로 끝났는데 나세르는 2003년 8월 마쉬가 꾸란과 무함마드를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마쉬는 이로 인해 2003년 11월 구속되었다가 오랜 법정 투쟁 끝에 2004년 12월 24일 그가 신성모독을 한 일이 없으므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마쉬는 주변 무슬림들의 공공의 적으로 인식되었으며 종종 살해위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과격한 무슬림들은 공장 사장에게 그를 해고하지 않으면 공장 운영자들도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해 재작년 갑자기 해고된 것이다. 마쉬는 신변의 안전 때문에 모처에 은신 중인데 그 아내와 학교에 다니는 네 딸과 어린 아들은 가장의 장기간 실직으로 생계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이런 사건을 접하면서 신성모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도 신성모독의 개념이 등장한다. 예수께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눅12:10)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고 하였다. 성경의 신성모독이라는 말은 신성 즉 하나님을 모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모독할 때에도 신성모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거룩한 책) 혹은 성서(거룩한 책)라고 한다.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책이라고 해도 성경을 읽다가 피곤하여 졸던 중 성경에 침을 흘렸다든지 혹은 성경이 찢어졌다고 해도 거기에 신성모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 거룩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지 그 말씀이 종이에 인쇄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꾸란을 읽다가 잠들어 꾸란에 침을 흘렸다면 이는 즉시 신성모독 죄가 적용되며 한 장이 찢어졌다면 이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모독 죄가 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기독교인들을 보면 성경을 구입했을 때의 형태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거기에 빨간색 혹은 노란색 등의 줄을 치기도 하고 연필 혹은 볼펜으로 깨알같이 메모를 해놓은 것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슬람의 꾸란에 만약 은혜가 되는 구절이라고 해서 볼펜으로 줄을 쳐 놓았거나 행간에 메모를 해 놓은 것이 적발되면 이 역시 신성모독죄가 적용되는 것이다. 무슬림 가정에 가보면 꾸란을 항상 높은 곳에 책걸이를 놓고 그 위에 얹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꾸란을 방바닥에 두었다가 부지중에 발로 차면 신성모독 죄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꾸란은 허리보다 낮은 위치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꾸란 모독죄는 종종 기독교인들을 학대하거나 학살하기 위한 도구로 악용된다. 꾸란을 찢어서 어느 기독교인 집에 던져 넣고는 기독교인이 꾸란 모독죄를 지었다며 다른 무슬림들을 선동해 얼마든지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꾸란 뿐 아니라 무함마드를 모독해도 신성모독 죄가 적용이 된다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의 대표적인 무슬림 학자 자밀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린 사진을 삽입한 것을 최대의 신성모독이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얼굴을 그리면 안 되며 사진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과서에 무함마드 얼굴을 넣으면 이슬람국들과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 사원을 이슬람 성원(聖院)으로 바꾸는 등 대한민국의 모든 교과서를 이슬람식 표현으로 바꿔놓아야 한다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며 죄가 없으셨던 예수님의 사진이나 그림을 실었다고 해서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꾸란에 죄인이라고 소개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꾸란48:2)의 얼굴을 그렸다는 것을 최대의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무슬림들은 2006년 덴마크 신문에서 무함마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나이지리아, 레바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50명 이상이 사망하는 유혈시위를 일으켰다. 만평 작가들에 대한 무슬림들의 살해 음모가 밝혀지면서 2007년 다시 한 차례 만평을 신문에 공개했더니 무슬림들이 폭도로 변해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초기 이슬람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슬람 초기에는 무함마드의 칼이 그 상징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발생국이며 이슬람을 가장 철저히 실천하는 대표적인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에는 이슬람의 신앙고백 밑에 전쟁용 칼을 그려 넣었다.

거의 매주 몇 건씩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무슬림들이 폭탄을 몸에 감고 알라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자살폭탄 테러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무슬림들의 자살폭탄 테러의 원인을 정치적인 배경에서 찾으려고 한다. 또한 중동의 역사나 외교적인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11세기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이나 20세기에 일어났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독립사건, 21세기에 이스라엘의 입장을 두둔하는 미국은 그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진실로 알라께서는 믿는 자(무슬림)들의 생명과 재산의 대가로 낙원을 주시리니 그들이 알라를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거나 혹은 죽임을 당한다면 구약(Taurat)과 신약(Injil)과 꾸란(Quran)에 기록된 알라의 약속대로 낙원을 상 받을 것이다. 누가 알라보다 더 약속을 잘 지키겠는가? 너희가 알라와 약속한 것으로 기뻐하라. 이것은 최상의 승리니라.’(꾸란9:111)

이 명령에 의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낙원의 침상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처녀들을 생각하며(꾸란55:54-56) 폭탄을 두르고 무고한 사람들과 함께 죽으면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한글로 번역된 꾸란에는 ’죽이거나’라는 말은 빼 버렸지만 아랍어 원문이나 영문 꾸란 중 어느 것을 보아도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무슬림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무함마드의 계시인 꾸란에 누누이 기록된 이 명령 때문에 그런 일들이 발생한다는 원인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전세계의 이슬람학자들이 원리주의, 자유주의, 온건주의 무슬림까지 모두 합의하여 이런 폭력을 부추기는 구절들을 꾸란에서 지우고 평화를 사랑하는 구절들을 삽입하여 새로운 꾸란을 만들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화로운 이슬람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파키스탄이나 이슬람권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신성모독죄에 의한 억울한 인권 침해현상은 온 인류가 뜻을 모아 대처해 나가지 않는다면 인류평화를 실현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