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2일은 ‘종의 기원’으로 전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탄생 2백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가 죽은지 120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심지어 그에게 ‘혁명’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진화론은 진화를 거듭해 과학은 물론 정치,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맹위를 떨친다. 생물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진화를 논하기엔 이제 그 몸집이 너무 커졌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충돌은 새삼스런 화두가 아니다. 인류의 기원을 두고 양자는 자신만의 과학적 논거를 제시하며 대립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답은 하나님만 아신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은 우리의 눈길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 옛날 그 곳에’(There Then)가 아닌 ‘바로 지금 이 곳에’(Here Now)로 말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있는가. 그 ‘진화 패러다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진화의 정치=역사적으로 진화론은 각 나라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이론 가운데 하나다.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유기체론의 시각에서 내놓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환경 적응에 유리한 부분을 보존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적용, 사회도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설명했다.
과거 유럽의 열강들은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을 자유방임을 옹호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최근 미국 정치에서도 진화 패러다임은 작용했다. “오바마의 당선은 인종 차별로 가득했던 미국 역사의 진화에 있어 주목해야 할 상징적인 순간이다”(뉴욕타임스), “백인들이 흑인도 인간이냐고 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진화했다”(LA타임스)
#진화의 경제=김창욱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장은 최근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경제의 진화 패러다임을 역설했다.
그는 기존 신고전파 경제학이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 그것이 뉴턴 역학에 입각한 기계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턴의 경제는 균형을 정상상태로 생각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내생적인 불안정성이나 급격한 변화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현실은 뉴턴 경제학이 그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오늘날 경제 현실은 다양성의 확대와 새로운 것의 끊임없는 출현으로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김 센터장은 “이제 경제학은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며 “변화를 정상 상태로 하는 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의 경제현실을 보면서 다윈을 다시 찾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진화의 문화=21세기는 그야말로 개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대에서, 나만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이와의 차이가 더욱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 시대로 옮겨간 것이다.
개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독립적 존재인 개체를 다른 개체와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독자적인 ‘제특성(諸特性)’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과 맞물린다. 정과리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예전에 변종은 기형으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는 변종이 오히려 정상이다. 인간은 점차로 ‘포스트 휴먼’으로 바뀌어간다”고 했다.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의 인권(개성)이 존중되고, 성전환자(트랜스젠더)나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 등 ‘포스트 휴먼’에 대한 편견이 미약하게나마 희석되고 있는 현상 또한 진화 패러다임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진화의 기독교=기독교에 진화 패러다임을 적용함에 있어서, 이것이 진화론의 적용과는 구별돼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진화 패러다임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기독교의 역사는 진화의 연속이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진 핍박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변이’였던 것이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적은 무리였음에도 시대와 사회의 환경에 깊이 뿌리내려 그 신앙을 이었다.
지금도 진화 패러다임은 유효하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사회 환경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 끊임없이 그 적응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로잔위원회 더그 버드셀(Doug Birdsall) 국제의장은 “번영신학과 거룩함의 부족, 교회 일치 문제, 순결성 부족,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적대 세력 등 내·외부적 문제들은 교회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며 “탈근대화, 다원화된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했다.
“진화론은 더이상 생물학적 주제 아니다”
“진화와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 필요”
이화여자대학교 최재천 자연과학부 석좌교수는 “진화론은 현재 생물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 법학 등의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물론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알게 모르게 현대인의 사고체계에 기본틀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최 교수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그 영향이 가히 혁명적이라는 평가 아래 ‘다윈혁명(Darwinian revolution)’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연 진화 패러다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어떨까.
오성현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는 “진화론은 진화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과학을 넘어 가치관적 접근 혹은 종교적 접근을 요구한다”며 “진화론은 이미 근대적인 합리성을 넘어 영성 내지 종교성을 갈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오늘날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인 토론 주제인 창조론과 진화론이라는 패러다임을 넘어서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미 진화론이 사회적 가치관과 결합하고 있는 것”이라고 오 교수는 덧붙였다.
오 교수는 또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창조론 대 진화론이 아닌, 윤리적, 종교적, 사회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진화 패러다임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변화’에 대한 생각과 희망은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지난 2일 창조론 오픈 포럼에서도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화를 강조한 바 있다. 양승훈 교수(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는 “서로로부터 배우려는 태도를 가져 건설적인 논쟁을 통한 지평의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고 조덕영 박사(에일린 신학연구원)도 “서로간의 대화가 복음 전파와 신앙에 좋은 시야를 열어준다”고 했다.
최한빈 백석대학교 기독교철학 교수는 “생명체가 진화됐다는 이유로 창조설을 부인하거나 진화의 목적을 말하는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분명히 대응해야 한다”면서도 “진화론의 사회적 영향 및 그 확산에 대해 개신교는 반대하고 저지할 것이 없다”고 했다.
최 교수는 “진화 패러다임, 즉 어떤 생명체든 고정돼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은 기독교세계관에 비춰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며 “다만 변화의 방향, 즉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원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방향으로의 변화든 그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진화’라는 단어에 무조건 거부감을 갖고 반박의 대상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그 섭리라는 대전제 안에서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성현 교수는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자연의 질서 또한 흐트러졌음을 말한다”며 “구원을 통해 우리는 만물과 함께 새롭게 되는 ‘새창조’를 맞게 될 것이다. 이 새창조는 옛창조의 변화와 변형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진화 패러다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을 단지 현 세계의 진보 내지 진화로 보는 것으로 흘러가서는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시킬 것”이라며 “모든 이행과 변화는 생명이나 존재가 가진 힘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가능하다. 그 주권에 의해 우리는 다윈이 상상도 못했던 변화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진화 패러다임과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을 강조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충돌은 새삼스런 화두가 아니다. 인류의 기원을 두고 양자는 자신만의 과학적 논거를 제시하며 대립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답은 하나님만 아신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은 우리의 눈길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 옛날 그 곳에’(There Then)가 아닌 ‘바로 지금 이 곳에’(Here Now)로 말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있는가. 그 ‘진화 패러다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다윈의 진화론은 세월을 따라 진화해 ‘진화 패러다임’을 낳았다. 현대인들은 정치,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이 진화 패러다임의 영향을 받고 있다. ⓒ편집=전선주 | |
과거 유럽의 열강들은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을 자유방임을 옹호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최근 미국 정치에서도 진화 패러다임은 작용했다. “오바마의 당선은 인종 차별로 가득했던 미국 역사의 진화에 있어 주목해야 할 상징적인 순간이다”(뉴욕타임스), “백인들이 흑인도 인간이냐고 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진화했다”(LA타임스)
#진화의 경제=김창욱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장은 최근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경제의 진화 패러다임을 역설했다.
그는 기존 신고전파 경제학이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 그것이 뉴턴 역학에 입각한 기계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턴의 경제는 균형을 정상상태로 생각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내생적인 불안정성이나 급격한 변화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현실은 뉴턴 경제학이 그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오늘날 경제 현실은 다양성의 확대와 새로운 것의 끊임없는 출현으로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김 센터장은 “이제 경제학은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며 “변화를 정상 상태로 하는 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의 경제현실을 보면서 다윈을 다시 찾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진화의 문화=21세기는 그야말로 개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대에서, 나만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이와의 차이가 더욱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 시대로 옮겨간 것이다.
개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독립적 존재인 개체를 다른 개체와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독자적인 ‘제특성(諸特性)’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과 맞물린다. 정과리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예전에 변종은 기형으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는 변종이 오히려 정상이다. 인간은 점차로 ‘포스트 휴먼’으로 바뀌어간다”고 했다.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의 인권(개성)이 존중되고, 성전환자(트랜스젠더)나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 등 ‘포스트 휴먼’에 대한 편견이 미약하게나마 희석되고 있는 현상 또한 진화 패러다임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진화의 기독교=기독교에 진화 패러다임을 적용함에 있어서, 이것이 진화론의 적용과는 구별돼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진화 패러다임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기독교의 역사는 진화의 연속이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진 핍박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변이’였던 것이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적은 무리였음에도 시대와 사회의 환경에 깊이 뿌리내려 그 신앙을 이었다.
지금도 진화 패러다임은 유효하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사회 환경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 끊임없이 그 적응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로잔위원회 더그 버드셀(Doug Birdsall) 국제의장은 “번영신학과 거룩함의 부족, 교회 일치 문제, 순결성 부족,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적대 세력 등 내·외부적 문제들은 교회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며 “탈근대화, 다원화된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했다.
“진화론은 더이상 생물학적 주제 아니다”
“진화와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 필요”
이화여자대학교 최재천 자연과학부 석좌교수는 “진화론은 현재 생물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 법학 등의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물론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알게 모르게 현대인의 사고체계에 기본틀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최 교수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그 영향이 가히 혁명적이라는 평가 아래 ‘다윈혁명(Darwinian revolution)’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연 진화 패러다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어떨까.
오성현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는 “진화론은 진화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과학을 넘어 가치관적 접근 혹은 종교적 접근을 요구한다”며 “진화론은 이미 근대적인 합리성을 넘어 영성 내지 종교성을 갈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오늘날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인 토론 주제인 창조론과 진화론이라는 패러다임을 넘어서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미 진화론이 사회적 가치관과 결합하고 있는 것”이라고 오 교수는 덧붙였다.
오 교수는 또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창조론 대 진화론이 아닌, 윤리적, 종교적, 사회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진화 패러다임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변화’에 대한 생각과 희망은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지난 2일 창조론 오픈 포럼에서도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화를 강조한 바 있다. 양승훈 교수(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는 “서로로부터 배우려는 태도를 가져 건설적인 논쟁을 통한 지평의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고 조덕영 박사(에일린 신학연구원)도 “서로간의 대화가 복음 전파와 신앙에 좋은 시야를 열어준다”고 했다.
최한빈 백석대학교 기독교철학 교수는 “생명체가 진화됐다는 이유로 창조설을 부인하거나 진화의 목적을 말하는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분명히 대응해야 한다”면서도 “진화론의 사회적 영향 및 그 확산에 대해 개신교는 반대하고 저지할 것이 없다”고 했다.
최 교수는 “진화 패러다임, 즉 어떤 생명체든 고정돼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은 기독교세계관에 비춰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며 “다만 변화의 방향, 즉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원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방향으로의 변화든 그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진화’라는 단어에 무조건 거부감을 갖고 반박의 대상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그 섭리라는 대전제 안에서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성현 교수는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자연의 질서 또한 흐트러졌음을 말한다”며 “구원을 통해 우리는 만물과 함께 새롭게 되는 ‘새창조’를 맞게 될 것이다. 이 새창조는 옛창조의 변화와 변형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진화 패러다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을 단지 현 세계의 진보 내지 진화로 보는 것으로 흘러가서는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시킬 것”이라며 “모든 이행과 변화는 생명이나 존재가 가진 힘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가능하다. 그 주권에 의해 우리는 다윈이 상상도 못했던 변화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진화 패러다임과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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