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란 어떤 단순한 어떤 공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어떤 재발견, 상실감, 문제제기, 회의와 같은 여러 과정을 거쳐 참된 믿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마치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아문 곳이 더 단단해 지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강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치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 상실감을 극복하고 더 풍성하고 든든한 어떤 것으로 나아갈 때 비로서 삶의 실체에 눈을 뜨게 됩니다.

삶을 부정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회의와 고통과 고민과 의문을 내어놓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영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요한 웨슬레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던진 파문은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경험은 어떤 교파를 만들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다시 한번 깊이 숙고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요한 웨슬레의 신학을 표방하는 성결교회 목사입니다.

그래서 웨슬레에 늘 관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감리교 계통인 아틀란타 에모리에서 공부할 때에 좀 더 웨슬레에 대해서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공부에 지쳐 3살된 딸과 아내를 데리고 밤에 훌쩍 웨슬레가 다녀갔다는 사바나에 다녀왔습니다.

웨슬레가 선교하기 위해서 왔다 갔다고 하는 조지아의 항구 사바나, 그가 목회했던 The Christ Episcopal church of savannah도 보고 왔습니다.

그의 신앙여정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지친 심령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국에서 아메리카까지 선교를 하기 위해서 멀리 항해하고 올 수 있었던 것 그 열정 자체만으로도 웨슬레는 대단한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인가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는가?

비록 웨슬레는 자신의 미국선교자체를 실패로 규정하지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어찌보면 자신을 부정하게 하고 새로운 삶의 실체를 발견하게 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어째거나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라고 나는 평가했습니다.


웨슬레의 신실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글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난 매일 한 두 시간씩 꼭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써 지켰고, 매주 성찬식에 참석하였다. 말에나 행실에나 단 한번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언제나 조심하였다. 나는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신학도가 되었고, 여전히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난 옥 중에 있는 죄수들을 찾아보았고, 빈민굴에 가서 가난한 사람을 병든 사람을 돌봐 주었고, 최선을 다했다. 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신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모든 계명만 잘 지키면 구원받는 줄 알았고, 또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했고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남보다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고, 온갖 선행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웨슬레는 병들어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른 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온갖 선행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서 웨슬레의 마음은 평안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대로 죽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시질 않을 것 같고, 도저히 확신이 없고, 안심하고 소망을 걸어볼 데라곤 어디도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전 과정을 수료하고 성직자로 임명되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없애기 위해 더욱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의 추천으로 아메리카로 향하여 대서양을 건너는 그 지루한 항해 중에도 종교 생활을 방심하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오는 기쁨과 평강이 없었고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무거운 짐일 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는 일기장에 유명한 이야기가 이렇게 써 놓고 있습니다.

"나는 인디안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아메리카로 건너왔다. 아~~그러나 누가 나를 개종시킨단 말인가? 나는 누가 건져줄 것인가? 이 믿지 않는 마음에서 나를 건져 줄자가 누구냐! 나의 종교는 한 여름날의 종교다, 내 생명을 위협하는 것만 없으면 나는 자신이 있고 거칠게 없다. 그러나 죽음이 나의 면전에 나타나 내 심령에 풍파가 이는구나!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들이 철학을 공부했는가? 나도 했다. 그들이 신학을 아는가? 나는 여러 해 연구했다. 그들이 영적인 것을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나도 그리 할 수 있다. 보라! 난 내 소유의 전체를 받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또 먹었다. 넘치게 수고하고 고난도 달게 받았다.

난 나의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안락과 명성을 버리고, 내 생명의 맨 주먹을 걸고 더위에 그을리고 피곤에 지쳤으며, 힘이 들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 생각하고 기쁨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과연 자녀인가? 또 의로운가? 앞으로도 내가 계속 이 마음을 끌고 갈 수 있는가? 과거는 그렇다 치고, 지금도 그렇다 치고 미래를 내가 책임 질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나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잇질 않다. 하나님에 대해 신뢰가 없다."


사실 이런 글들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경건하고, 노력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그렇게 부귀와 명예가 아닌 성결하게 살려고 했던 이 사람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었는가? “누가 나를 건져줄 것인가?”라는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알고는 있지만 마음에 깊은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웨슬레의 삶 속에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합니다.
그의 생애를 바꿀 수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거룩한 만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아메리카로 선교를 가는 항해 도중 그가 탄 배는 무서운 폭풍을 만납니다.
웨슬레는 죽음의 대한 공포를 부인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배에 탄 25명의 모라비아교인들은 한 사람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웨슬레는 그들의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7시에 모라비아교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들의 생활속엔 깊은 경건이 스며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의 겸손은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을 솔선수범해서 돌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 보수없이 남을 돌보고 있나요? 하고 물으면,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더한 일도 하셨는데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온유했다. 그들의 입에서는 불만 불평이 나오질 않았다. 돛이 산산 조각이 나고, 배엔 모두 물바다가 되었다. 아수라장인 가운데 그들은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참말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죠, 무섭지 않습니다".

웨슬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신과는 너무나 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구원을 받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무리와 처음 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바로 구원 받은 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페터 뵐러라는 이름의 목사였는데 사실 이 사건이 저는 더 관심이 갑니다.
이 역시 거룩한 만남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옆에 두고 있습니다.
페터 뵐러목사님과 웨슬레는 내적인 문제를 주고 받은 결과 웨슬레는 자기에게 구원 받은 믿음이 전혀 없음을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솔직한가?
바로 이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마침내 시인한 것입니다.

“나는 결국 목사도 아니요, 선교사도 아니요,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다만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한 죄인의 위치로 되돌아 온 것이다.

얼마나 간절히 믿음을 추구해 왔던가!

그러나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젠 다시 설교하지 말아야겠다.
자기 자신도 분명히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는 어떤 결단을 내립니다.

그 후 웨슬레는 율법적인 행위는 그만두었지만, 그의 불안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갑니다.

그 때 하나님은 페터 뵐러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단순한 이 편지는 저를 감동시킵니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주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주신 연민의 정이 이미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야말로 당신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십니다. 그가 당신 속에 들어와 사시는 것을 느끼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신앙의 죄에서 풀려 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아들이 하신 일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


웨슬레도 구원이 인간의 공로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단 번에 된다는 사실이 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순식간에 이루어 질 수 있지?

당장 사람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육의 비참한 처지에서 의(義) 가운데로 그리고 성령의 기쁨 가운데 들어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실이 모두 순간적으로 구원 얻은 그것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의 이성으로 납득이 되질 않았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질 않았는데 이전 같으면 모두 `이단`이라고 당장 일갈해 버릴 수 있었지만, 그의 맘은 이미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주일 날 그는 구원받은 무리들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믿는 순간에 주신 것과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공포에서 성결과 평안으로 이르게 하신 일들을 간증하였습니다.


오직 웨슬레의 부르짖음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웨슬레는 새로 발견한 이 믿음을 자기 교단에서 두려움 없이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자기경험을 들어 그러한 믿음을 발견하지도 못했으면서, 누구든지 믿는 순간에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 짐을 거리낌 없이 외쳤습니다.

받지 못한 자가 어떻게 전할 수 있는가?


반응은 냉담했고 교회는 하나 둘씩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는 어느 교회에서도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진리를 가르쳤건만 진리와 그 전파자는 배척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놀라운 날이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모임이 있어 가보았습니다.

‘단순한 페인트공인 홀런드씨가 인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그 사람이 말할 때 이상하게 그의 마음에 감동이 왔다. 그는 그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바로 내 죄를 제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웨슬레는 처음으로 마음속에 일어난 사실을 간증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산 믿음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쉼과 평강 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에서부터 해방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평강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3)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십자가에서 세상 모든 죄를 해결하신 것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 후에 즉 죄사함 후에 마음에 성령이 계셔서, 평강과 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38)

웨슬레는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따돌림이나 핍박이 문제되지 않았고 마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쉼이 그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음 안에 주님이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었겠지요.
구원 받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평안,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한번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더 현실적인 참된 ‘두 번 태어난’ 믿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재발견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실제로 ‘회심’을 체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회심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재난, 어려움, 고통, 고난 등등 어떤 힘든 과정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두 번 태어난 믿음이 필요합니다.

거듭 태어난 영혼, 곧 눈이 활짝 열린 사람의 간증을 보십시오.
다윗은 이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참된 찬송(시편 30편)을 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회심한 심령, 두 번 태어난 심령에게는 절망적이고 부족한 믿음을 버리고 감사로 충만한 믿음을 재발견하는 이것은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굽이굽이 험난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