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신병 치료를 위해 귀국하다(1912)
앞에서도 언급했듯 하위렴은 초임선교사들만 남아있던 목포에 부임해 양동교회 당회장과 영흥학교 교장, 게다가 스테이션 조성공사는 물론 순회 사역까지 맡아 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늦은 나이에 자녀를 얻었음에도 가족들과 함께 휴가 한번을 떠나 보지 못할 정도로 사역에만 매달리다 보니 자신은 물론 에드먼즈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상처喪妻 후 다시 만난 아내였기에 하위렴은 허약해진 에드먼즈를 자신의 건강보다도 더 염려했다. 그는 휴식을 취하라는 동료 선교사들의 권유를 처음엔 무심코 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에드먼즈의 상태가 점점 악화하고 있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목포에 부임한 지 3년. 그는 다시 아내의 치료를 위해 미국행을 결정해야 했다.
하위렴은 이때부터 지부 내 여러 사역을 충격이 없이 인계하기 위해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먼저 동사목사였던 윤식명을 위임목사로 세우며 양동교회의 리더십 이양을 서둘렀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기 전 자신이 돌보고 있는 23개 교회를 전부 순회한다는 일정을 잡고, 강행군을 해 1911년 12월 초순까지 자전거와 말을 타고 330마일을 여행하며 2회에 걸친 순회를 끝내면서 그해 4/4분기에만 해도 세례를 신청한 117명 가운데 64명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을 베풀었다.
한편 그해 12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하위렴은 군산지부를 방문해 10여 군데의 지역교회를 돌아보면서 9개 교회에서 성찬을 베풀고, 50명의 지원자 가운데 24명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미국에 돌아가면 자신들의 체류가 길어져 어쩌면 조선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날 사역했던 군산을 방문해 교회와 교인들을 둘러보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이 되는 대목이다.
그달 중순에는 자신들의 부재로 인해 가장 염려가 되었던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맡아줄 니스벳 부부가 전주로부터 부임하자, 이때부터 그는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위렴은 윤식명 목사에게 교회를, 니스벳 부부에게 남녀학교를, 순회 사역은 낙스Robert Knox/로라복와 맥컬리Henry D. McCallie/맹현리에게, 그리고 병원은 오웬의 후임으로 부임한 하딩Maynard C. Harding과 군산 구암병원에서 사역하던 오긍선에게 맡기면서 스테이션의 공백을 메꾸어놓았다.
한편 3살과 1살짜리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부산까지 이동하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로 쇠약해진 에드먼즈를 위해 니스벳 부부가 동행하겠다고 나섰는데 순천 선교지부 고라복Robert T. Coit 선교사는 이때의 하위렴 부부의 건강상태를 일본에 있는 친구 카메론Cameron Johnson에게 편지하면서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어쩌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기약 없는 귀국이 될 것 같다.'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KMF 편집장을 맡고 있던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 선교사 역시 하위렴 부부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교잡지에 공지하면서 그들이 회복되어 속히 조선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1912년 연초에 미국으로 돌아간 하위렴 선교사 내외는 잠시 오레곤에 머무르며 요양하다가 고향에서 가까운 켄터키주 루이빌로 거처를 옮겼다. 3년이 지난 1915년에 다시 조선에 복귀하면서도 허약한 몸을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건강 문제로 인해 선교사역 내내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몬트리트에서 열린 선교사 대회에 참가하다(1913/1914)
그는 신병 치료차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자나 깨나 관심은 늘 조선에 있었다. 1913년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Montreat, NC)에서 남장로교 해외선교사 대회(8/13~8/17)가 개최될 때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참가해 조선 선교의 개황을 보고하고, 조만간 추수를 대비해야 할 교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의 교회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4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대회(8/12~8/16)에도 순천지부 고라복Robert T. Coit 선교사와 함께 참가해 조선 선교의 상황을 설명하는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때 먼저 등단한 고라복Robert T. Coit 선교사는 조선 복음화 과정을 보고하기에 앞서 먼저 내한 선교 25년 동안 조선에 일어났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놀라운 변화는 단지 철도가 놓이고 증기선이 다닌다거나 전화, 은행, 학교의 설립이 아니라 25만 명의 교인이 생겨난 사실'이라고 강조하고, 그는 조선에서의 비약적인 선교 효과는 바로 복음에 대한 조선인의 겸손한 수용성에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조선 복음화의 시급함을 강조하면서 열려있는 선교의 문이 언제 어떻게 일제에 의해 닫힐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 교계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빠르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연이어 등단한 하위렴은 미국 역사상 조선에 제일 먼저 접촉했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들이 조선의 왕릉을 도굴하려 했던 적이 있음을 지적하고 당시 이 일로 분노한 조선 조정에서는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모든 선원의 목을 베어 대동강에 수장시키고, 제너럴 셔먼호의 닻을 떼어내 평양 서문에 전시해 둔 것을 언급했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묻기 위해 사절을 파견해 조선과 공식적인 대화를 시작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은 '당시 조선이 외국인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를 먼저 이해했어야만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일에 대한 미국 정부의 안일한 대처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서 조선 선교의 현안과 조선교회의 미래를 설명하면서 비록 미국의 교파주의 때문에 조선에 하나의 개신교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파 간의 예양협정을 통해 갈등과 다툼이 없이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고했다.
고비를 딛고 다시 한국으로
해외선교사 대회가 열렸던 그해(1913) 연말쯤 하위렴은 아내의 건강이 나아지고 있음을 선교부에 알렸다. 그는 이번 겨울에 조선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늦어도 이듬해 봄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동안 전해 듣지 못했던 내한 선교부의 소식을 물으며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들리는 모든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며, 우리는 지난 6월 30일로 마감하는 한해의 마지막 통계를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위렴의 기대와는 달리 1914년 봄이 되어도 에드먼즈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1914년 9월이 되어서야 해외 선교부에서는 의사들의 말을 인용해 에드먼즈의 회복 소식을 싣고, 2년 전 에드먼즈가 미국에 돌아올 때 만해도 그녀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이번 가을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해외 선교부의 예상을 단신으로 싣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