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다. 주일 예배 후 친교실, 같은 식탁에 둘러앉은 성도들이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기도가 아니다. 각자의 화면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몸은 한자리에 모였지만 마음은 저마다 다른 세계에 흩어져 있다. 어쩌면 이 풍경은 우리가 맞이할 시대의 예고편이다.
공유된 현실이 무너진다
기술은 이제 인간의 감각을 넓히는 수준을 넘어,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를 다시 쓰고 있다. 고글 하나로 다른 세계를 여는 가상현실이 있고, 눈앞의 세계 위에 정보를 덧입히는 증강현실이 있다. 구글이 델타항공 공항 전광판에 시범 적용한 평행현실 기술은, 같은 화면을 보면서도 사람마다 다른 안내문이 보이게 한다. 나란히 서 있는 승객들이 똑같은 전광판을 바라보면서도, 저마다 자신이 타야 할 항공편 정보만 골라 보게 되는 것이다. 뉴스 피드부터 지도 앱, SNS 필터까지 인공지능은 이미 각자의 취향에 맞춘 ‘나만의 현실’을 조용히 배달하고 있다.
공동체는 ‘함께 보는 현실’ 위에 세워진다. 같은 사건을 보고, 서로의 표정을 읽고, 같은 이야기를 물려받을 때 공동체는 숨을 쉰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이 반세기 전 예견한 ‘외로운 군중’은, 오늘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알고리즘이 골라 준 현실만 소비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되었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앨버트 보그만(Albert Borgmann)은 이 현상을 더 쉬운 그림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세상 물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버튼만 누르면 수고 없이 원하는 것을 곧바로 내주는 물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직접 몸을 움직이고 함께 둘러앉아야만 누릴 수 있는 물건이다. 스위치 하나로 방을 데우는 중앙난방기가 앞의 예라면, 장작을 패고 불을 지펴 온 가족이 둘러앉는 벽난로는 뒤의 예다. 오늘 우리 손 안의 화면은 정확히 앞의 것을 닮았다. 정보와 위안을 편리하게 배달하지만, 그것을 나눌 사람도 자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도 이 물결 바깥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화면이 골라 준 설교를 듣고, 알고리즘이 추천한 신앙 콘텐츠를 소비한다. 한 지붕 아래 모인 성도들이 사실은 서로 다른 ‘기독교’를 보고 있을 수 있다. 물론 기술이 재택 성도를 예배로 잇고 여러 언어로 말씀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도리어 공동체를 조용히 쪼갤 수 있다는 사실을, 교회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몸으로 믿는 종교, 교회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교회에는 여전히 소망이 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가상 세계와 정반대되는 것, 곧 몸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은 화면이나 홀로그램이 아니라 만질 수 있는 몸으로 오셨다. 부활하신 주님도 의심하는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 20:27) 하셨다. 초대교회 역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행 2:46) 살았다. 바울은 이 몸의 신학을 개인의 차원에서 공동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 눈이 손에게, 손이 발에게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말할 수 없듯이(고전 12:21),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역시 지체들이 서로에게 물리적으로 잇대어 있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유기체다. 로마서가 참된 예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는 명령으로 규정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예배란 정신의 동의가 아니라 몸을 실어 나르는 행위이며, 그 몸은 반드시 다른 몸들 곁에 있어야 한다. 각자의 화면이 아니라 하나의 식탁, 그것이 교회의 원형이다.
알고리즘 시대, 교회의 네 가지 실천
첫째, 교회를 마지막 광장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은 취향과 성향에 따라 사람을 끊임없이 나누지만, 교회는 세대와 계층과 정치 성향이 달라도 한 말씀 아래, 한 떡 앞에 마주 앉는 곳이어야 한다. 성찬은 다운로드할 수 없다. 그 몸의 자리가 이 시대에 거의 마지막 남은 공적 만남의 장소다.
둘째, 골방을 회복해야 한다.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마 6:6)고 하셨다. 화면이 주는 가짜 골방은 사람을 세상에서 끊어 놓는 고립이지만, 기도의 골방은 사람을 하나님께 더 깊이 붙들리게 하여 다시 세상으로 보내는 자리다.
셋째, ‘스마트폰 없는 식탁’을 회복해야 한다. 친교 시간, 각 테이블에 작은 바구니 하나면 충분하다. 가정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화면 없이 온 가족이 마주 앉는 식탁 예배를 실천할 수 있다. 초대교회가 날마다 떡을 떼며 나누었듯, 작지만 구체적인 몸의 훈련이면 된다. 벽난로 곁에 둘러앉듯, 함께 수고해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다시 만드는 일이다.
넷째, 다세대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미주 한인교회는 언어와 예배 시간표까지 갈라져 1세와 1.5세, 2세가 한 지붕 아래서도 서로 다른 평행현실을 살아가기 쉽다. 한 달에 한 번, 통역 없이도 온 세대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양 두어 곡과 성찬만으로 한 예배당에 모이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 여운을 이어 세대별로 짝지어 앉는 식사 자리 하나만 더해도, 세상이 갈라놓은 세대를 교회가 몸으로 다시 잇는 실천이 된다.
기술의 발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더 선명한 화질의 가상 세계보다 귀한 것이 있다. 내 곁에 있는 지체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보는 능력이다. 각 사람이 각자의 현실 속으로 흩어지는 시대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여전히 한 떡을 떼고 한 잔을 나눈다. 그리고 선포한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현실은 화면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