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Photo : ) 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인근의 한 중형 교회. 부교역자로 3년째 사역하던 30대 초반의 전도사가 어느 날 담임목사에게 조용히 사직서를 내밀었다. 이유는 간결했다. “저도 제 삶이 필요합니다.” 주 6일 사역, 새벽기도 인도, 주말 청년부 수련회, 교인 심방, 이민자 행정 서류 도움까지. 그는 3년 동안 목회자인지 사회복지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나날을 보내왔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허탈한 담임목사와, “또 전도사님이 바뀌었네”라는 교인들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그 무심함 속에는 어쩌면, 오래된 고통의 반복에 이미 무뎌진 공동체의 슬픔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오늘 미주 한인 교회 곳곳에서 조용히 반복되는 현실이다. 미국에서 한인 교회는 단순한 예배 공동체가 아니었다. 정착 정보, 통역, 정서적 지지까지 맡아온 이민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 짐이 목회자 개인에게 집중되어 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야 한다.

목회자는 왜 이렇게 많은 짐을 지는가
한국의 교회와 미주 한인 교회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내부 구조는 사뭇 다르다. 미국에서 한인 교회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인 동시에 이민 공동체의 실질적 생활 지원자다. 새벽에 운전면허 시험장까지 교인을 태워다 주고, 낮에는 병원 동행 통역을 하고, 저녁에는 심방을 다니는 일이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이것은 목회자 개인의 성격이나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이민 사회가 교회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구조의 산물이다.

그 구조가 얼마나 촘촘한지는 숫자가 말해준다. 미주한인교회연구소와 복수의 교단 통계를 종합하면, 미국 내 한인 교회는 3,500개에서 4,000개 사이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출석 교인 100명 미만의 소형 교회가 절반을 훌쩍 넘는다. 소형 교회일수록 목회자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역할은 더 넓고, 재정적 보상은 더 열악하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주중에는 부업을 병행하면서도 주말에는 전임 사역자처럼 헌신을 요구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MZ세대 직장인들에게 직업 선택의 핵심 기준이 된 지금, 젊은 목회자들도 이 질문 앞에 서기 시작했다. 이민 교회 현장에서 워라밸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치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더욱 절박하다.

하나님도 쉬셨다—안식은 창조의 일부다
성서는 쉼을 나약함이나 불성실의 표시로 보지 않는다.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이 안식하셨다는 선언으로 완성된다(창 2:2–3). 주목할 것은, 이 안식이 창조의 ‘마무리’가 아니라 창조의 ‘완성’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 ‘샤바트’는 단순히 ‘멈추다’가 아니라 ‘충만함에 이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식은 노동의 소극적 중단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완성하는 적극적 행위였다. 신명기의 안식일 규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과 나그네까지 함께 쉬게 하라고 명한다(신 5:14). 타국 땅에서 쉼 없이 일하는 이민자들과, 그들을 돌보다 지쳐가는 목회자들 모두가 이 말씀의 수신자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히브리서 4장의 안식 신학은 쉼을 단순한 회복의 도구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약속이자, 창조의 리듬 안에 새겨진 은혜의 구조다. 번아웃된 목회자에게 ‘더 버텨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은혜의 구조를 외면하는 일이다.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를 떠올려 보라. 갈멜 산의 불 내리는 기적 이후, 그는 이세벨의 협박 한 마디에 광야로 도망쳐 로뎀 나무 아래 쓰러졌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 19:4). 하나님의 응답은 꾸짖음이 아니었다. 천사가 두 번이나 찾아와 음식을 주며 말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이 머니라”(왕상 19:7). 하나님은 먼저 쉬게 하셨다. 그리고 그 쉼 위에서 새 소명을 주셨다. 번아웃된 목회자가 건강한 공동체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은 경험의 언어이기 이전에, 성서가 먼저 증언하는 진리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막 6:31).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직전에 나온다. 쉼은 기적의 서막이었다. 충분히 쉰 제자들이 있었기에,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의 현장에 함께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소명에는 시간표가 없다
동시에 성서는 소명을 노동 계약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미주 한인 교회 목회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에는 계약서에 적히지 않은 수많은 ‘강도 만난 자들’이 있다. 체류 신분의 불안 속에서 단속을 피해 숨어 사는 교인, 갑작스러운 해고로 이번 달 렌트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정, 언어 장벽 앞에서 의료 시스템에 접근조차 못하는 노인 성도. 이들의 필요는 주일 오전 11시 예배 시간표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를 다시 읽어보라. 강도 만난 자를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도 지켜야 할 일정이 있었을 것이다. 신성한 의무, 합당한 이유.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합당한 이유보다 길가에 쓰러진 한 사람을 더 중히 여기셨다. 미주 한인 교회의 목회자는 매일 이 비유의 갈림길에 선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신학교 강의실 안이 아니라, 낯선 나라의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져 있다.

안식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 갈림길에서 눈을 감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충분히 쉰 목회자만이 그 갈림길에서 멈출 수 있는 내면의 여백을 갖는다. 탈진한 사람은 눈앞의 필요를 보면서도 반응할 에너지가 없다. 안식은 소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을 오래 감당하기 위한 근력을 키우는 시간이다.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야 할 문화
이 문제의 해법은 목회자 개인의 결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미주 한인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문화의 문제다. 미국장로교(PCUSA)와 미국복음주의루터교회(ELCA) 등의 사례를 연구한 풀러신학교의 목회자 건강 연구(2022)는, 정기적인 안식 제도를 운영하는 교회의 목회자 번아웃 비율이 그렇지 않은 교회보다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미국 내 일부 한인 교단은 5년 이상 사역한 목회자에게 4주에서 8주의 유급 안식월을 보장하는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혜가 아니라 공동체의 지혜다.

소형 교회는 재정 구조상 단독으로 이 제도를 운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근 교회들이 연합해 설교 교환이나 순회 사역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면 소형 교회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목회자 번아웃 점검과 전문 상담 연계를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교회 차원의 시스템도 현실적 대안이다. 목회자의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서 교인의 가정을 돌봐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도는 문화의 그릇일 뿐, 그 안을 채우는 것은 공동체의 신학적 인식이다. 교회가 목회자의 안식을 ‘허락’이 아닌 ‘책임’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문화가 바뀐다. 목회자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공동체는 결국 자신도 소모된다. 반대로 목회자의 인간적 한계를 신학적으로 존중하는 공동체는, 그 목회자로부터 더 깊고 더 오랜 헌신을 이끌어낸다. 쉼을 허용하는 것이 공동체의 관대함이 아니라 공동체의 자기 보존이라는 인식, 바로 거기서 문화의 전환이 시작된다.

다시, 소명의 자리로
로스앤젤레스의 그 전도사가 사직서를 낸 지 두 해가 지났다. 그는 지금 다른 도시의 작은 교회에서 다시 사역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담임목사가 달랐다. 매주 하루 온전한 쉬는 날을 보장했고, 분기마다 재충전의 시간을 주었다. 돌아온 그 전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쉴 수 있게 해주니까, 오히려 더 헌신하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안식은 헌신의 반대말이 아니라, 더 깊고 더 오랜 헌신을 위한 준비다. 쉼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기 위해 몸을 낮추는 것이다. 엘리야를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지쳐 쓰러진 목회자들 곁에 계신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이 머니라.” 그 음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주 한인 교회가 이 오래된 진리를 공동체의 문화로 함께 회복할 때, 목회자도 교인도 더 먼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쉼과 소명은 서로를 지운다. 안식이 깊을수록 헌신도 깊어진다. 엘리야를 먹이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말씀하신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이 머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