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주 기독일보가 오프라인 발행 1천호를 넘어 새 이정표를 세웠다. 이민교회와 함께 걸어온 23년, 미주 기독일보는 이민교회를 함께 만들어 나간 우리 주변의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억척스럽게 일궈낸 이민역사 가운데 그들의 간증은 저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 첫 순서로 바울세계선교회 대표 한영숙 목사의 삶과 목회를 나눠서 싣는다. 한인 목회자로는 처음으로 맨하탄에 성전을 세운 한 목사의 파란만장한 목회와 사역의 뿌리는, 그보다 앞서 더 거친 시대를 건너며 믿음을 살아낸 부모 세대와 한국교회의 오래된 신앙 풍경 속에 놓여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다양한 학술활동을 이어 가며, 평생의 동반자이자 목회의 조력자였던 고 김종환 목사의 생애와 신학적 자산을 발굴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 한 목사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상주에서 단단하게 붙들어 온 신앙은 서울에서 처음 균열을 맞았다. 대학에서 만난 자유롭고 비판적인 신학은 한영숙 목사에게 구원의 확신마저 흔드는 낯선 질문의 세계였다. 바로 그 빈틈으로 사회정의와 운동권의 언어가 파고들었고, 그는 산업선교와 학생운동, 반정부운동의 현장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됐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택할 때만 해도 한영숙 목사의 기대는 분명했다. 좋은 교회학교 교사가 되려면 먼저 자신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실제 대학에서 만난 것은 기대했던 신앙의 심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등학교 때까지 분명했던 구원의 확신이 무너지고, 신앙의 기초가 뿌리째 흔들리는 시간이었다.
“저는 기독교학과에 가면 기독교교육 같은 걸 배우는 줄 알았어요. 좋은 교회학교 교사가 되려면 내가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들어가 보니까 전혀 다른 세계였지요. 성경이 사람이 쓴 책이라는 얘기를 듣고, 내가 체험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철학이나 심리학의 질문 속에 들어가 버리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확실했던 것이 다 무너졌어요. 제일 괴로웠던 건 구원의 확신이었어요. ‘내가 오늘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나’ 그 질문 앞에서 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 안에서 발버둥을 치게 되는 거지요.”
무너진 확신을 대신할 무언가를 절박하게 찾던 그때, 교수들과 시간강사들이 들고 온 것은 사회정의의 언어였다. 죄는 개인의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악의 문제이며,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사회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는 설명이었다. 당시 한영숙 목사에게 그 말은 단순한 시대 담론이 아니라, 잃어버린 구원의 확신을 대신해 줄 새로운 길처럼 들렸다. 그는 훗날 그 시절을 돌아보며, 한때는 “아, 이 길이 내 구원의 길이구나” 하고 솔깃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한영숙 목사는 산업선교와 학생운동, 반정부운동의 현장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대학교 4학년 여름에는 인천의 방직공장에 학생 신분을 숨기고 들어가 40일 동안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살아보는 위장취업도 했다. 자신이 “한국 위장취업 1호”였다고 회고할 만큼, 그는 그 흐름의 선두에서 몸을 던졌다. 당시 그가 몸담았던 산업선교와 운동권의 분위기는 단순히 노동 현장의 고통을 체험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기존 사회 구조를 뒤엎고 부숴야 한다는 급진적 인식과 맞물려 있었고, 한영숙 목사 역시 그 안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전태일 사건 이후 그는 데모와 학생운동, 반정부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이화여대 학생들을 서울대 시위 현장으로 이끌 만큼 앞장섰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그는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새벽연합예배 직후 영락교회를 향한 과격한 선동에 나설 정도로 깊이 들어가 있었다. 사회정의에 앞장서지 않는 교회는 무의미하다는 비판과 함께, 극단적인 구호까지 준비할 만큼 급진화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곁에 있던 이들이 만류하면서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만큼 한영숙 목사는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일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영숙 목사 안에서는 다른 질문이 커졌다. 이렇게 살아서, 자신은 결국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해 기독교 사회윤리를 공부할 때도 그 연장선은 계속됐지만, 정작 자기 삶의 방향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기독교학과를 나와도 교사 자격증조차 얻기 어려웠고, 그는 “나는 절대 목사로 살 생각은 없는데, 그렇다고 이 공부를 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현실적 고민 앞에 서게 됐다.
그때 서광선 교수는 그에게 1년 휴학을 권하며 현장을 직접 체험해 보라고 했다. 그렇게 들어가게 된 곳이 화곡교통이었다. 버스 차장들을 위한 교양교사라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100명 가까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현장을 매일 드나들며 지켜보는 자리였다. 그는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나름의 개선안을 만들었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식사 불만을 줄이기 위해 차장들을 운영 과정에 참여시키자는 안은 오히려 더 큰 불평을 낳았다. 원래 일도 버거운 아이들에게 일을 더 얹는 구조가 됐기 때문이다. 그 순간 한영숙 목사는 한국 사회의 밑바닥에서 합리성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절감했다고 했다.
“내가 그걸 보면서 뭔 생각을 했는가 하면 한국이란 나라가 합리성이 안 통하는구나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나를 가르치던 사람들은 계속 부숴야 한다고 했거든요. 내가 그러면 누가 세우느냐고 물었더니, 세우는 건 걱정하지 말라 그러더라고요. 부숴 놓으면 누군가가 세운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화곡교통에서 절실하게 깨달은 건 그게 아니었어요. 대한민국은 부시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이 나라를 위해서 내가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 일을 해야지, 부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요.”
화곡교통은 한영숙 목사의 사상을 돌려세운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세상은 부수는 것으로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화여대 학생이든 버스 차장이든 결국 인간의 실존적 고민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구분보다 더 깊은 곳에, 장래와 관계와 삶의 불안을 둘러싼 공통의 고민이 놓여 있다는 것을 그는 그곳에서 봤다. 그렇게 사회정의와 운동권의 언어로만 세상을 보던 시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급진적 사고로 무장했던 한영숙 목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은사 또한 존재했다. 바로 당시 허혁 이화여대 교수였다. 한 목사는 허혁 교수를 두고 성서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매우 성실한 학자였다고 회고했다. 사회정의와 운동권의 언어 속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으로 들끓던 시절, 허혁 교수는 그에게 신학이 단순한 이념의 도구가 아니라 성경 본문과 역사, 인간 실존을 깊이 파고드는 작업임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허혁 교수가 번역하던 불트만의 『예수』와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을 가까이서 접하고, 번역 원고 교정까지 도우면서 한 목사는 사상을 앞세워 세상을 재단하는 태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믿음과 역사, 인간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눈을 배우게 됐다.
허혁 교수의 영향은 단지 책을 읽게 한 데 그치지 않았다. 한 목사는 그 곁에서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성실함을 익혔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조급한 열심보다 성경과 인간을 더 정직하고 깊게 이해하는 일이 먼저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운동권적 사고와 좌경화된 흐름에서 점차 거리를 두고 복음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다시 붙들게 된 데에도, 허혁 교수를 통해 배운 이런 신학적 절제와 성서신학적 시선이 중요한 밑바탕이 됐다.

당시 한계를 느낀 것은 사회를 바꾸려는 열심이 아무리 크다 해도 결국 인간의 영혼까지는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뛰어다녔지만 정작 자신 안의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은 여전히 비어 있었던 것이다. 시대를 향한 분노는 있었지만, 자기 자신이 어디서 용서받고 어디서 살아나는지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다시 복음 앞으로 돌아오게 된다.
“죄사함이라는 게 뭔지를 그때 알았어요. 인간의 실존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깊게 깨닫게 됐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자각과 함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왔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그때 내 실존 안에서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목사가 되겠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단했지요.”
이 결심은 훗날 한영숙 목사가 진보적 색채가 강한의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에도 평생 복음주의의 터 위에서 신학 연구와 목회를 꿋꿋하게 한 길로 걸어가게 한 결정적 기반이 됐다. 그의 목회와 신학의 근본은 항상 '성서 위에서'였다.
결단 이후 그는 미국으로 가서 더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됐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김종환 목사의 삶은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누구라도 선뜻 함께 미래를 그리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한영숙 목사가 김종환 목사와의 결혼을 택한 것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열려 있던 가능성과 명예, 앞으로의 기대까지 함께 내려놓는 선택에 가까웠다. 부모와 주변, 자신을 아끼던 선생들까지 놀라고 섭섭해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내가 이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완전히 난리가 났지요. 부모님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기대를 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김 목사하고 결혼함으로써 진짜 세상을 다 버린 것 같았어요. 내 가능성, 그동안의 명예, 대학에서의 앞으로의 희망, 진짜 모든 걸 다 버린 것 같았지요. 좋게 말하면 순수한 거고 용감한 거고, 그냥 저 사람의 인생을 내 인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였어요.”

미국에 온 뒤에도 현실은 곧장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김종환 목사는 미국에 와서 미술 공부를 이어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더 이상 자신의 길을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한영숙 목사 역시 더는 공부만 붙들고 있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섰다. 결국 그는 감리사를 찾아가 생활을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이미 목회 후보생이었고, 한국의 가족에게도 돈을 보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때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일을 구하는 대신, 한인교회를 개척하라는 제안이었다. 감리사는 한영숙 목사에게 교회를 개척하면 돕겠다고 했고, 그는 곧바로 브롱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종환 목사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전했다. 유학생의 시간은 그렇게 끝나기 시작했고, 목회의 시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차도 없었고, 맨하탄 밖을 나가본 적도 거의 없었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이 결국 붙든 곳이 맨하탄이었다. 새 거처를 마련하고, 교회가 시작될 자리를 찾아다니는 일은 하나하나가 막막한 현실과 맞서는 일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한영숙 목사의 맨하탄 목회의 첫걸음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교회를 시작한다고 해서 현실이 곧바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 목회자이자 이민자, 그리고 아무 기반 없는 개척자로 서야 했던 그의 미국 목회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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