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구 장로(바른구원관선교회).
(Photo : ) 김병구 장로(바른구원관선교회).

나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구원론을 고민해 왔다. 예정, 선택, 견인, 은혜, 자유의지 같은 단어들은 신학교 교실에서만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의 삶 속에서도 실제적인 질문이 된다. 그 긴 고민 끝에, 나는 칼빈주의 구원론보다 웨슬리안 구원론이 내 신앙 양심과 삶의 경험에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선택은 어느 신학이 더 논리적으로 정교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어느 신학이 사람을 더 깨어 있게 만들고, 더 거룩하게 살도록 이끄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칼빈주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절대성을 탁월하게 강조한다.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부정하고, 구원의 시작과 완성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점에서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지킨다. 그러나 이 교리가 교회 현장에서 단순화될 때, “이미 선택되었으니 안전하다”, “견인이 있으니 크게 염려할 필요 없다”는 식의 신앙 태도로 변질되는 경우를 나는 적지 않게 보아 왔다. 그 결과, 회개와 긴장은 약해지고 성화는 뒷전으로 밀리기 쉽다.

반면 웨슬리안 구원론은 인간의 책임과 순종을 숨기지 않는다. 은혜는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응답을 요구하며 거부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웨슬리안 신학은 신자를 방관자로 두지 않는다. “이미 괜찮다”가 아니라 “오늘도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위협이라기보다 현실에 가깝다. 방심하면 신앙이 식고, 순종을 멈추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경험은 많은 보통 신자들이 공감하는 신앙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웨슬리안 구원론을 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삶으로 검증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교리의 정확성보다 열매를 보셨다.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은 신학 논쟁에 앞서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성화의 삶을 진지하게 요구하는 신학이 더 복음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 분별에 가깝다.

물론 웨슬리안 구원론에도 긴장과 위험은 있다.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다 보면 불안과 자기 의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위험은 “값싼 은혜”라는 또 다른 위험과 비교해야 한다. 신앙이 삶을 바꾸지 못하고, 확신만 남긴 채 거룩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과연 복음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완벽한 신학 체계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죄와 싸우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는 신앙을 원한다. 그런 점에서 웨슬리안 구원론은 나를 안심시키기보다 깨우고, 변명하게 하기보다 회개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예수님의 길과 더 닮아 있다고 믿는다.

결국 이 선택은 신학적 승패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다. 나는 오늘도 “나는 선택되었는가”보다 “나는 주님을 닮아 가고 있는가”를 묻는 신앙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신학이, 나에게는 진리처럼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