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돈 로빈슨의 성경적 설교를 위한 제안 (3)
- Dr. Haddon Robinson 등 목회자 및 신학자들의 공저로 제작된 The Art and Craft of Biblical Preaching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약력)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와 달라스신학교(Th.D.) 그리고 일리노이스대학교(Ph.D.)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달라스신학교와 고든콘웰신학교 교수 및 덴버신학교 총장직을 역임했다.
<본문 설명과 적용의 균형>
그것은 아주 절망적인 설교였다. 댈러스에 있는 한 교회가 요한복음 14장에 관해서 설교하도록 나를 초청했다. 그 설교는 죽음과 재림에 대해서 주석적인 질문들로 가득했다. 당신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라는 구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런 장소를 만드시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영적 잠은 어떤 것인가? 나는 그 본문을 연구하느라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주석들을 읽느라 한 주를 보냈다.
내가 설교하러 올라갔을 때, 나는 숙제를 마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문제들이 어려웠지만, 나는 그 문제들을 연구했고 자신감도 있었다. 나는 할당된 본문에 대한 견고한 성경적 가르침을 전할 준비가 되었다. 채 5분이 지났을까 나는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10분이 지났을 때 사람들은 졸기 시작했다. 앞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듣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 아침을 이야기하는 오늘조차도, 나는 뱃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문제는 나의 흥미를 유발하는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전체 설교를 사용한 데 있었다. 내가 말했던 모든 것들은 유용했다. 그것은 아마 신학교 강의실에서는 능력 있는 강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는, 그 강단에서는 아주 절망적인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청중의 삶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문제들이 아닌 나의 질문들에 답했던 것이다. 그날 내가 이야기했던 그 설교 시간에 몇몇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 원했던 것은 ‘그분께서 나를 무덤의 한 쪽 고랑에 쳐 넣을 것인가? 그분께서 나를 안전하게 본향으로 인도하실 것인가? 내가 천국에 갔을 때 그것은 어떨까?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기를 원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께서 2,000년 동안 우리가 거할 처소를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단지 6일이 걸렸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그분께서 만들고 계실 처소가 어떨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생을 마감할 때, 그곳이 바로 그분께서 여러분을 위해 기다리고 계실 장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설교했어야 했던 내용이다. 최소한 나는 그들의 질문들을 가지고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전체 설교에서 성경에 근거함이 없이 실제적인 적용들만을 가지고 설교 전체를 채우는 것도 그 반대 면에서 실수하는 것이다.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그 둘 사이를 채움 없이 이동하며 설교하는 마천루식(높은 빌딩 지붕을 건너뛰는 것) 설교를 할 수도 있다. 그런 설교는 사람들의 관심을 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원한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비성경적 관찬들로 가득 찬 설교는 절대적으로 만족을 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내용이면 충분한가?
그러면 우리의 설교에서 성경적 내용과 삶의 적용 사이에 어떻게 바른 균형을 잡을 수 있는가? 기본적인 원리는 사람들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만큼 성경적 정보를 주는 것이다. 더 이상은 필요치 않다. 그러고 나서 당신의 적용으로 옮겨 가라. 이 시점에서 주석과 설명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은 유용하다. 주석은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얻는 과정이다. 이것은 종종 동사의 시제 혹은 원본에서 단어의 강조는 어느 부분에 있는가 등을 주목해 살펴봄으로써 이뤄진다. 이것은 당신이 준비할 때, 당신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일 설교에선 적절치 않다.
사실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과도한 사용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 수 있다. 나의 전문직에서 특별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일로서 사람들을 납작하게 하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이것은 청중과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들 수 있는 오만한 행동인 것이다. 나는 10년 동안 크리스천 의치과협회(the Christian Medical and Dental Society)의 회장으로서 봉사했다. 때로 의사들은 나와 이야기할 때 의료 기술적 용어들을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친구 중에 한 사람에게 “네가 나에게 이야기하듯이 환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하네. 나는 그 전문 용어를 모르기 때문이라네. 나는 교육받은 사람이야. 하지만 자네가 받은 그 의료 분야에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닐세.” 당신은 그가 나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아는가? 그는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종종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같은 실수를 한다네”라고 답변했다.
스펄전이 옳았다. 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학문적 언어를 배울 수 없다. 그러므로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시장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번역하는 것은 목사의 일인 것이다. 생살과 같은 주석은 주일 아침 설교에 맞지 않는다. 주일 아침 설교에 해설이 필요하다. 해설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주는 것이며 당신의 주석에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주석에서 한 모든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본문의 구조와 흐름을 알 필요는 있다. 그 본문을 읽고 “아! 나는 그것이 말하는 것을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에서 주석을 하기 위한 장소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세부적인 주석의 가르침은 강의실에서나 적합한 것이다.
설교에 대한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라는 질문
모든 설교는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포함한다. 이집트의 고고학에 대한 강의는 흥미 있을지 모르지만 설교는 아니다. 설교는 삶을 만지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적용을 요구한다. 그 실제적인 적용은 항상 해명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나의 차를 빌렸는데 펑크가 났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나를 부르고 “나는 이런 종류의 타이어를 갈아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한다.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여분의 타이어를 찾는지, 재킷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바퀴 쇠를 빼는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등을 말한다. 일단 내가 당신에게 모든 지시사항들을 주고 나서 “이제 나는 당신에게 권면합니다. 타이어를 갈아 끼우십시오!”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이미 당신은 그 차를 움직이게 하기를 원한다. 이미 당신은 그런 필요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권면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당신은 분명한 설명을 필요로 할 뿐이다.
어떤 설교는 마치 그와 같다. 당신의 사람들은 성경의 어떤 본문과 씨름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를 원한다. 그들이 그 본문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것을 적용하는 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권면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들의 본문에 대한 질문들은 반드시 대답돼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을 들어보자. 당신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을 수 있는가?와 같은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 질문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청중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의하는 바울의 좀 더 복잡한 논의로 이끌 수 있다. 당신이 그것을 잘 설명하면, 설교 후에 사람들은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 하나님께서 의롭게 남아 계시는 방법이군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분명히 이 본문은 커다란 적용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복잡해 당신은 아마 바울의 주장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상세하게 설교에서 많은 실제적 적용들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면 된다. 만약 그들이 상실감의 문제를 정말로 이해한다면, 구원의 해결은 하나의 강한 적용으로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제적인 적용을 할 수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뢰해야 한다. 내가 이룬 가장 좋은 상장들 중에 어떤 것은 내가 다음과 같은 하나의 개념을 얻었고 계속해 그것을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다. 이것은 나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물론 당신은 청중이 가지지 못한 지식, 당신이 그들과 함께 나눌 그런 지식을 정말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여러분이 나의 경우였더라면, 여러분도 같은 정보를 얻었을 수 있습니다”와 같이 말하는 청중을 무시하지 않는 태도로 그 지식을 나눌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청중을 위해 모든 실제적 적용들을 해야 하고 그들을 위한 그들의 사고를 한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청중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당신이 “여러분은 이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청중을 치욕스럽게 하는 것일 수 있다. 나의 경우는 그 반대의 방향에 더 큰 위험이 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설명에 사용하고 적용에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설교 뒤에 종종 ‘이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보였어야만 했다’라고 느낀다. 우리가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청중은 자신들의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
실제 삶의 예들: 필요하지만 위험한 것
우리는 어떤 원리를 삶으로 끌어오기 위해,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실제 삶의 예화들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예들은 “누가 어떻게 이 문제를 직면했는지 그 예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여자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삶의 예들이 필요한 만큼 그것들은 위험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겸손에 대한 원리를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라. 크리스천은 예절 바르게 옷을 입어야 합니까? 그 대답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적용하는가? 한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는 무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덮는 길이의 치마를 입은 사람으로 교회를 가득 채웠다. 그 교회에서 어떤 원리의 한 가지 적용은 그 원리 자체의 모든 경우를 의미하는 힘이 된 것이다. 이것은 율법주의의 본질이다. 그 원리의 힘을 하나의 구체적인 적용에 주는 것이다.
나는 일기를 계속해서 쓰는 한 친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기에 관해 설교했을 때, 그는 마치 일기를 쓰지 않는 크리스천은 자랄 수 없는 것 같이 말했다. 당신이 “여러분이 이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이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주의이다. 만약 당신이 “이것은 진리가 적용되는 방법이다”고 말할 때, 당신은 가능한 율법주의의 위험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실제적인 적용을 위해 설교할 수 있는가? 두어 가지 예로 대답해 보려고 한다. 나의 아버지께서 80세가 되셨을 때,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오셨다. 나이가 더 드셨을 때, 아버지의 행위는 우리가 더 이상 집에서 모실 수 없는 그런 일들을 하셨다. 아버지의 이상한 행위가 아버지 자신과 이이들에게 위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를 간호해 주는 집에 보내드렸다. 아버지를 그곳에 계시게 하는 것은 나의 월급의 반을 지불케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8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아버지를 방문했다. 8년 동안 나는 아버지를 그런 곳에 계시게 한 죄책감으로 한 번도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있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를 우리 집에 계시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적절히 돌봐 드릴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암으로 죽어 가시는 장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덴버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셨다. 그것은 우리 결혼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힘든 기간이었다. 나는 덴버신학교의 학장으로서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내 보니는 어머니와 밤낮으로 함께 있었다. 아내는 분뇨로 더러워진 어머나의 침대를 하루에 6~7차례씩 갈아 주었다. 19개월 동안 보니는 우리의 집에서 어머니를 돌봐 드렸다. 빅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후회가 없었다. 우리는 보니가 어머니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평안히 모시기 위해 그녀의 최선을 다한 것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나이든 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 당신은 그분들을 당신 집에서 모실 것인가 아니면 보호소에 둘것인가? 여기에 하나의 기독교적 대답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상황, 당신의 자녀들, 당신의 재정 그리고 당신의 부모님들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지도 원리가 있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고 사랑으로 그분들을 대해야 한다. 기독교적 결정을 내리길 원한다면, 당신은 어떤 이기적인 전제를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최선이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그 원리를 적용하는지는 여러 가지 변수들의 복잡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때 율법주의의 함정에 벗어나는 길은 성경의 원리와 구체적인 적용의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이것을 이뤄내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원리를 하나가 아닌 두 세 가지 다양한 예들과 함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그 원리를 한 가지 특별한 적용의 방법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아이들과 함께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 실패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문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가정 에배였다. 우리는 모든 접근법으로 노력했지만, 그들은 결코 우리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들을 위해 밖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안쪽에 있었던 그들은 달려 나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참았다. 나는 한 가족의 제단은 한 크리스천 가정의 중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가정 예배를 어떤 원리가 아닌 원리의 적용이라는 것을 꺠달았다. 그 원리란 나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을 기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 예배에, 그 예배 뒤에 있는 원리에 속한 같은 명령을 잘못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위한 다른 접근법을 생각해냈다. 두 아이는 다른 시간에 학교로 떠났다. 매일 아침 비키가 떠나기 전에 나는 그 하루와 그날 만나게 될 일들을 위해 그녀와 함께 기도했다. 조금 뒤에 토레이와 그의 친구들 중에 하나가 나의 서재로 왔다. 우리는 앉았고 5분 정도 그들의 한 날을 위해 기도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아침 식탁에서 가족 예배를 드린 것으로 설교에서 만족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그런 방법은 그 원리를 존중하는 효과적인 것이었다. 설교자는 원리와 적용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 원리는 추상적이고 모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설교자는 그 원리를 청중이 이해하는 용어들로 단순히 번역한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기에 벌목업에 관련된 시민들로 이뤄진 서부의 정착촌이 있었다. 그 도시는 그들이 교회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의 건물을 짓고 목사를 초청했다. 그 설교자는 정착촌으로 옮겨왔고 처음에 환대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 오후에 그는 통나무들을 끌고 있는 교구의 어떤 사람들을 우연히 보았다. 그 통나무들은 상류의 다른 마을에서 강을 따라 강둑으로 떠내려온 것들이었다. 각 통나무들은 한쪽 끝에 소유주의 이름이 찍여 있었다. 매우 당황스럽게 목사는 그 통나무들을 끄는 성도들이 주인의 점검 표시가 있는 부분을 톱으로 잘라내는 것을 보았다. 다름 주일에 그는 “너는 도덕질 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강력한 설교를 했다. 예배 후에 그 청중은 줄을 지어 열광적인 축하를 했다. “목사님!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힘 있는 좋은 설교였습니다!” 그 반응은 그를 상당히 괴롭혔다. 그래서 그는 다음 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갔다. 그는 같은 설교를 했으나 다른 결론으로 끝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이웃의 통나무들의 끝을 잘라 내지 말라.” 그가 설교를 끝냈을 때, 청중은 그를 도시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청중이 분명히 이해하는 용어로 원리를 언급하는 것은 가능하다.
청중도 설교한다
설명과 적용의 관계를 보여 주는 다른 방법은 각각 부르는 대명사들을 보는 것이다. 좋은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청중과 일치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있다. 히브리서에서 대제사장은 사람에게 관련된 일들을 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택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대제사장은 죄를 짓는 것이, 용서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대제사장은 사람들과 함께 사함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하나님께 백성들을 드렸다.
그러나 희생제를 드림으로써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속죄를 백성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드렸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냈다. 이런 역할을 설교가 어느 정도 담당하는 것이다. 내가 좋은 설교를 듣고 있을 때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설교자가 말할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한다. 설명의 시간이 지났다. 적용의 시간이 왔다. 이 시점에서 설교자는 ‘당신’이라는 말로 ‘우리’라는 말을 대신하는 게 좋다. 이제 더 이상 설교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인 원리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적용하고 있는 두세 가지 방법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이것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돈을 쓸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당신은 결혼 서약을 신실하게 유지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들은 진리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복수의 당신이 아니라 단수로서 개인적 당신). 이 시점에서 설교자가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회중과 분리돼 서있지 않다. 그는 단순히 각각의 청중이 개인적 적용을 만들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분석으로 효과적인 적용은 기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방법이라기보다 자세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의문들, 아픔들, 두려움들 그리고 씨름하는 문제 등을 성경으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철학으로 설교에 접근할 때 불쫓이 튈 것이다. 어떤 사람의 문제에서 부싯돌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철에 부딪힐 것이고 불꽃이 튈 것이다. 그 불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불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