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에서 비전 50 선교회가 필자의 전임 목사이자 원로목사이신 윤일흠 선교사께서 30 여 년 전,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던 연변의 꽃제비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에서 시작되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때 국경 일대에서 어린 생명의 눈물을 닦아주던 작은 사랑이, 주님의 권능에 붙들려 오늘의 세계 선교 운동을 일으키는 위대한 불씨가 되었다.
하여 2000년대 초, 우리는 중국 동북삼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의 조선 족과 한족 목회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게 되었다. 필자 역시 연길, 통화, 영안, 무단장, 하얼빈, 훈춘, 장춘, 심양, 강핑, 내몽골 인근 교회들을 두루 방문했다. 놀라운 것은, 그곳 교회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처럼 치유와 축사와 같은 능력이 드러났으며, 이는 부족한 필자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셨음을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다.
당시 조선족 사회는 큰 격변기를 지나고 있었다. 많은 가정이 이산가족이었고, 부부 중 한 명 혹은 모두가 한국으로 일하러 떠난 사이,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경우가 흔했다. 남편이 술에 의지하거나 가정폭력으로 자녀들이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가정도 많았다. 그 속에서 미래의 꿈을 꾸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장학 사역을 시작하였다.
현지 목회자들이 추천한 학생들을 면담하며 믿음과 하나님의 비전을 품도록 격려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학생과 신학생들이 지원을 받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며 교회 부흥의 주역이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정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인재로 자라났다. 이 장학 사역은 30년 동안 수만 명을 후원하며 각 지역 교회의 부흥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필자가 섬긴 교회의 성도들이 해마다 선교 기간마다 $300~$500 을 기쁨으로 봉헌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헌신을 쉼 없이 이어왔다는 사실이다.
또한 30년 전부터 동북 삼성 지역 교회들이 크게 부흥하여 성전 건축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에 비전 50 선교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원리를 따라 현지 교회의 헌신을 우선 요구하였다. 교회의 절반 헌금이 마련된 것을 확인한 후, 나머지 절반을 지원하여 2003 년부터 2010 년까지 23개 조선족·한족 교회 예배당을 봉헌할 수 있었다. 대형교회가 아닌 작은 교회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동시에 건축 사역이 지역 교회에 도움은 되었으나, 선교의 확장성과 부흥보다는 안일함으로 이어지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났다.
필자는 선조들이 치열하게 살아왔던 만주 벌판을 밤기차를 타고 수없이 오갔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처럼, 기차 창가에서 만주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시간 기도하곤 했다. 그러나 2010 년을 지나며, 동북 삼성 지역 선교의 확장성과 역동성이 점차 사라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많은 한국 교회의 지원이 쏟아지는 가운데, 조선족 교회의 영적 순수성과 자생력이 오히려 약화되고 있었다.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필자는 만주 벌판을 뒤로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비전 50의 새로운 여정을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고 온 만주 벌판’은 비전 50선교의 출발지였음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민족을 끊임없이 만주 벌판에서 사용하시니,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