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 목사
길선주 목사

개종의 시대적 요인
전쟁과 질병으로 절망적 상황
전쟁 피난처이자 질병 치료해
황폐한 세상의 희망으로 여겨

개종의 종교적 요인
인격적 신관, 세 번 만나 개종
개인·국가 발전 문명화된 종교
죽어도 살 수 있는 '영생' 희망 

2025년 한국교회가 선교 14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들을 계획 중인 가운데, 한국교회 초기 대표 인물인 길선주 목사의 개종과 말세 신앙에 대한 연구가 발표됐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2회 학술발표회가 3월 8일 오후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학술발표회에서는 오혁 전도사가 1차 사료들을 참고해 '개신교 전래 초기 길선주의 개종과 말세 신앙 강화'에 대해 시대적 요인과 종교적 요인으로 나눠 연구 발표했다.

오혁 전도사는 "길선주는 1931년 '조선예수교회(朝鮮예수敎會) 건설 시대(建設 時代)의 위인(偉人) 중(中) 한 분'으로 불릴 만큼 한국 개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길선주는 개신교인이 되기 전 명성이 전국에 알려진 도교인(道敎人)이기도 했다. 그가 개종한 1897년은 개신교 전래 초기였는데, 그는 어떻게 도교를 떠나 개종했을까"라고 질문했다. 

먼저 길선주 개종에 대한 시대적 요인으로 그는 "길선주 개종 당시, 평양은 황폐화된 도시였다. 청일전쟁 시기 많은 조선인들은 청나라와 일본 군대에 소속되어 전쟁에 당사자가 됐고, 생필품이 징발당해 경제적 곤란을 경험했다"며 "또 전쟁과 더불어 확산된 이질, 장티푸스, 말라리아, 일본 콜레라 등의 질병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자,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고 사회적 관계는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신교는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오 전도사는 "청일전쟁 당시 길선주가 믿고 있던 선도(仙道)는 황폐화된 상황 속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지만, 개신교는 전쟁의 피난처이자 질병을 치료하는 장소가 됐고, 사회적 관계가 깨어진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구축했다"며 "그 가운데 도교 수련 시절부터 친했던 김종섭이 개신교인이 돼 그를 전도해 개종에 이르렀다. 길선주에게 개신교는 사회적 위기와 깨어진 사회적 관계에 대응하고, 황폐화된 세상 속에서 희망을 주는 종교였다"고 풀이했다.

길선주 개종에 대한 종교적 요인에 대해선 "개신교의 인격적 신관, 문명화 종교로서의 개신교, 그리고 영생이 있었다"며 "길선주는 개신교의 신이 인격적이기에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음성을 듣고 '죄를 용서하고 살려 달라'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이러한 만남 후 그는 개종했다"고 전했다.

또 "개신교는 그에게 현세에서 개인과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문명화된 종교'였다. 그는 <천로역정>을 통해, 개신교와 문명화를 연결하는 매개가 '신의 사랑'이라고 여겼다. 개신교 신을 '사랑이 있기에 사람들을 돕고 문명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으로 이해한 것"이라며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영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에 개종했다. 예수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광주청사교회 마룻바닥영성체험관에 마련된 ‘길선주 목사 기념호텔’ 내부 모습. ⓒ크투 DB
▲광주청사교회 마룻바닥영성체험관에 마련된 '길선주 목사 기념호텔' 내부 모습.  

말세 신앙 강화 시대적 요인
세계대전 후에도 평화 요원해
3.1운동에도 독립 이루지 못해
하나님 부정 신학에 위기의식

말세 신앙 강화 종교적 요인
수감 중 기도와 계시록 암송해
'묵시록 강의' 재정리와 체계화
'무궁안식 세계와 새 예루살렘'

다음으로는 길선주의 말세 신앙 강화 속 시대적·종교적 요인을 탐구했다. 길선주 목사는 특히 3.1운동으로 수감됐다 출소한 후, 14년간의 전도에서 '말세학'을 적극 전파했다. 그는 수감 당시 낮에는 성경을 읽고, 밤에는 기도와 계시록을 암송해 '묵시록 강의'를 재정리한 결과 '말세학'을 체계화, 이후 강연의 90%가 '예수 수난과 말세학'이었다고 한다.

오혁 전도사는 먼저 길선주의 말세 신앙 강화에 영향을 끼친 시대적 요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3·1운동 실패"를 꼽았다. 이에 대해 "길선주는 이러한 시대 배경 가운데 성경을 해석, 제1차 세계대전이 성경과 예수의 예언대로 성취된 것으로 파악했다"며 "전쟁 후 평화회의가 열렸음에도 평화는 오지 않았고, 3·1운동으로 독립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말세 신앙을 강화하고, 세상의 평화는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힘으로 된다고 외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 전도사는 "일제가 1920년대 문화통치를 펼치면서 한국에 사회주의 등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과 신학이 유입되고 신세대가 출현해 세대 갈등이 일어나자, 길선주는 사람들 정신이 어지러워지고 신앙이 약화되며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았다"며 "그는 결론적으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게 됐고, 말세 신앙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종교적 요인으로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길선주는 특정한 종말론적 관점을 담고 있는 서적들을 접하면서 시대를 판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며 "그는 위험하고 변화하는 시대를 보면서 당대를 말세라 여기게 됐고, 암울하고 병든 시대를 위해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악함을 멸하시고 그를 의지한 자들에게 '무궁안식 세계와 새 예루살렘'이라는 구원을 주실 것이라 희망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와 함께 "길선주는 말세 신앙을 강화하고, 사회적 비난 속에서도, 심지어 죽을 때까지 말세가 다가왔다고 외쳤다"며 "길선주에게 '무궁안식 세계'는 이 땅이 마침내 선하게 변하게 될 '희망'이었고, '새 예루살렘'은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이 부활해 영화와 복락 속에서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희망'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길선주는 예수 재림으로 건설된 평화의 낙원이 신자들의 무궁한 소망이 된다고 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들은 시험을 받을 때 참고 견뎌야 하고, 시험을 참아 이기면 영생의 상을 받게 되며, 게으른 자들을 본받지 말고 회집하기에 항상 근면하라고 설교했다"며 "그는 말세 신앙을 강화하다 체포되고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말세가 다가왔다고 외쳤다. 길선주는 '내가 예수의 福音(복음)을 웨치다가 죽는거시 맛당한 일'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고창 예배당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 1935년 11월 26일 오전 9시 30분 사거(死去)했다"고 정리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이 외에 김민정 교사(광주 푸른꿈창작학교)가 '1920-1940년대 지리산 노고단 선교사 유적지(Graham Camp)의 디지털 문화콘텐츠 제작 방법 연구'를 발표했다. 논찬은 최상도(호남신대)·한규무(광주대) 교수가 각각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