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문화연구소(소장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는 최근 일본 선교 지역과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지도를 분석한 결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3·1운동이 가장 강하게 일어난 지역이 부산, 경상남도, 함경북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김 소장에 따르면, 한일 강제 합병 이후 한국의 종교인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기독교를 한국에 포교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약화하고 일본식 종교로 변질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일본 기독교는 하나님을 천황으로 칭하며, 조선총독부로부터 선교비를 지원받아 전국적으로 포교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한국 기성교회를 인수하며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 기독교 세력이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조선 기독교보다 강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산·경남·함경북도 지역에서는 일본 기독교의 포교가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일본 기독교의 선교 활동이 제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부산에서는 일신 기독교 여학교를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기독교가 천황을 하나님으로 칭하며 교회 예배에 천황 참배를 강요하자, 부산·경남·함경북도의 기성 교회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당시 일본 기독교 신자의 90%는 구미 아이(組合) 교회 소속이었으며, 총회장이었던 에비나 단조(海老名 彈正)의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을 학살하고 귀와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삼은 다치바나(立花) 왜장 중 한 명이었다.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는 일본 기독교의 주요 포교 지역은 경기도와 전라북도로, 3·1운동 당시 해당 지역에서 3000명 이상의 신자가 활동했다. 그다음으로 전라남도와 평안북도가 뒤를 이었으며, 이후 평안남도(500명), 경상북도, 강원도 순으로 일본 기독교 세력이 확산됐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친일 세력도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부산·경남 지역은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 방식과 신앙 교리의 영향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활발했다. 이 지역에서는 보수주의·절대주의 신앙을 강조한 호주 선교사들이 활동하며, 신앙적 이유로 일본 기독교의 포교에 강하게 저항하는 경향을 보였다.
김문길 소장은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이후 3·1운동이 발생한 지도 올해로 106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라도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지역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지역이 존재했다"며, "이는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 교리와 선교 방식이 지역별 정신문화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