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 신학자입니다. 그는 1961년에 시카고대학에 초청 교수로 가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강의가 있던 날, 신학대학 학장은 청중들에게 “바르트 박사가 건강도 여의치 않고 몹시 피곤한 가운데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싶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말합니다. “대신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제가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학장은 그 저명한 신학자를 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얻은 그 수많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노대학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은 이 질문에 대해 그가 무슨 말을 할까를 잔뜩 기대하며 귀를 기우렸습니다. 바르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몇 분간 생각에 잠깁니다. 얼마 후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눈을 뜹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얻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경이 나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대 신학자의 입에서 나온 고백치고는 너무나 소박해서 어쩌면 듣는 이들이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바르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을 이미 우리 마음에 품었으니까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과 바꾸신 예수님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던지는 헌신과 희생으로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십니다. 그들을 치유하고 온전케 하고 하나님 나라 비전 메이커로 살아가도록 북돋워주십니다. 땅의 비루한 욕정에 붙들려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가르치십니다. 이 땅의 가치와 질서 속에 깃든 악의 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힘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현실을 하늘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 하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말입니다.
산에서 바위틈에 뿌리내리고 사는 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생명의 강인함을 봅니다.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나무는 뿌리에서 나오는 산성용액으로 바위를 녹이며 뿌리를 뻗어간다고 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뚫는 겁니다. 처마 밑에 놓아두었던 댓돌이 빗방울에 움푹 패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포근한 대지가 날카로운 칼을 품고서 녹슬게 하여 녹이는 것도 그런 진리를 깨우칩니다. 딱딱하고 강한 것이 무르고 약한 것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생명 세계는 그 반대입니다. 생명에 가까운 것일수록 부드럽습니다. 부드럽지만 무력하지는 않습니다. 작고 연약한 것 앞에 다가갈 때 우리 영혼은 맑아집니다. 천국 주권자로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가장 연약한 아기로, 가장 비천한 종으로 오신 것이 성탄절의 비밀이고 신비입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사실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오는 성탄절을 가장 의미있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누군가로부터 받을 선물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성탄절의 유일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고귀한 선물인 아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세상에 선물이 되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위로부터 가장 큰 선물을 그저 받았으니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그저 나눠주는 그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 있다면 세상은 한결 따뜻해지고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복된 선물이 되는 성탄을 기대하며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