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필립 얀시나, C.S. 루이스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체스터턴(G. K Chesterton 1874-1936)이 쓴 책 “Orthodox, 정통”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끝없는 욕망이 있고 자유롭기 때문에 같은 것이 반복되고 거듭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항상 ‘또 해봐, Do it again’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보다 더 의욕적이고 지칠 줄 모르신다. 매일 아침 태양을 향해 ‘또 해봐’ 라고 말씀하시고 좋아하신다. 우리는 죄를 지으며 늙어가지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보다 젊으셔서 ‘또 해봐’라고 오늘도 말씀하신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놀라운 것은 매 순간 크고 작은 실수가 있더라도 지치지 않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여기에 놓치지 말고 끊임없이 직, 간접적으로 나누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주는 가장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 저자는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것을 보라” 마 28:6 여기서 빈 무덤, 그리고 예수님이 누우셨던 자리를 직접 목도하라고 이야기 하는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아주 생생하게 인도하는 모습으로 비추어 집니다. 그곳은 분명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증표가 되게 합니다.

부활에 관한 찬송 중 “부활 찬송 Lancashire - The Day of Resurrection”이 있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는 7세기 그리스 다마스쿠스의 성자 요한 (St John of Damascus 675 or 676-749)이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부활로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쓴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영국 성공회 프리스트요, 찬송 작가인 존 메이슨 닐( John M. Neale, 1818-1866) 이 1862년 번역을 해서 당시 영국의 교회음악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헨리 스마트(Henry T. Smart, 1813 -1879) 가 작곡을 하여 부활 찬송으로 만들어져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을 소재로 2014년 미국의 교회음악 작곡가 메리 멕도널드(Mary McDonald, 1956- )가 “부활 찬송(The Day of Resurrection)으로 안템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을 보면 화려한 팡파르와 오프닝 합창이 무덤을 이기신 우리 구세주의 승리를 알립니다. 마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듯한 모습으로 리듬을 반복하여 사용하며 서서히 돌문이 열리는 현장을 연상케 하는 전주를 보여 줍니다. 이어서 조성을 격상하여 (Bb-C) 헨리의 찬송을 등장시켜 부활의 축제를 펼칩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조성을 상승 시켜(C-D) 2번째 절을 대입하여 데스칸트의 화려함을 첨가하고 회중을 초대하여 부활의 축제를 온 회중들과 나누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서주의 멜로디를 다시 등장시켜 화려한 팡파르를 울리며 부활의 축제를 종결 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분명 동정녀 몸에서 태어나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사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 하셨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는 명확합니다. 20 세기 초 1차 세계 전쟁 이후에 나타나 유행했던 다다이즘(Dadaism)이라는 하나의 철학적 사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해서 유럽과 미국을 거쳐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이룬 예술 운동을 통해 형성된 하나의 사조입니다.

이 예술 운동은 당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쟁으로 인한 살육과 파괴에 대한 증오와 냉소를 기본 정신으로 해서 여러 난해한 표현을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문화적 가치, 전통적 가치, 그리고 이성적 신뢰를 부정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예술 형식의 파괴와 무가치 함을 주장하여 현존하는 모든 미적 가치를 없애려 하였습니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사람은 프랑스 시인인 폴 엘르아뤼(Paul éluard, 1895-1952)입니다. 그가 쓴 글귀 중 “Hope is raises no dust(소망은 먼지를 일으키지 않는다)” 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 말에 소망이라는 단어가 무언가 의미심장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듯한데 실상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 그대로 먼지와 같은 뿌연 연기를 퍼트리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복음의 완성을 이루신 그 사건을 오늘날 현대문명이 주는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많은 교회들에서 표현하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진실이 이 다다이즘의 사조처럼 혹시 너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우리 마음에 담고 있는 부활 신앙이 애매모호 하지는 않는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탈 진실 시대가 되어서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킴으로 개인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애매해 하거나 추상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즉 복음의 절대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절대성을 믿는 우리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박스 안에 그 복음의 진리를 담아 내려는 어리석음 또한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앞에 그 복음을 담고 나를 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인자한 얼굴로 내게 미소를 지으며 “Do it again , 또 해봐” 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연상합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인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는 오늘도 소리높여 외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내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라는 고백이 중심이 되는 일상의 모든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