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전쟁과 조용기목사의 등장: 오순절 신앙
해방과 한국전쟁은 한국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해방 후 3년의 혼란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그라고 2년뒤 6.25 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한국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사회에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민주주의가 등장했고, 6.25 전쟁은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400만명의 희생을 가져왔다. 6.25 직전에 진행된 농지개혁은 전통적인 지주계급을 붕괴시켰고, 이것은 사람들을 도시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도 가세하였다. 이제 한국사회는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 전환하고 있얶다.
조용기목사의 가족도 이런 변화를 겪었다. 원래 천석꾼의 집안이었던 조용기의 부친은 일제말 개간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여 성공했으나 해방 후 1950년 농지개혁으로 재산을 잃고, 이어 면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남은 재산도 다 탕진하였다. 이어서 일어난 6.25 전쟁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잡자기 부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피란기의 임시수도가 되었고, 수많은 외국인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조용기는 부산공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여기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조용기는 어학에 재능이 있어 이들로부터 영어를 배우개 되었다. 당시 조용기는 폐결핵에 걸려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가난과 질병으로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지먼 그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영어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나타난 것은 미국선교사였다.
해방과 6.25는 한국기독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해방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돌아왔으며, 특히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중국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이 새로운 임지를 찾아야 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왔다. 이들은 강력한 반공사상을 갖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기독교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오순절운동의 등장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등장한 오순절운동은 해방 이후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선교지를 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미국기독교는 한국을 중요한 선교지로 생각했다. 당시 일어난 한국전쟁은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말세에 우리가 싸워야할 영적 전쟁이다.
해방 후 한국사회에 등장한 오순절운동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강하게 믿는 은사중지반대론자들이었다. 이들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초대교회 이후 사라졌다는 전통적인 교리를 반대하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불변하신다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쳤다. 물론 해방 이전에도 한국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믿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은사중지론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이후 새롭게 등장한 오순절운동은 영적인 갈급함 가운데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오순절운동은 조용기라는 젊은 지도자를 통해서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조용기에게 오순절운동은 새로운 소망을 주었다. 그는 오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여 병에서 치유받았고, 그가 배운 영어를 통하여 선교사들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어린 조용기목사는 아무런 전통에 메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순절운동을 순수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절대절망 가운데 있었던 조용기와 미국 오순절운동의 만남은 한국기독교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기성기독교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중지되었고, 단지 과거 성경만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메시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오늘에서 맛볼 수 있다는 새로운 메시지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3. 산업화시대와 조용기목사의 등장: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한경직목사가 건국과 한국전쟁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조용기목사는 산업화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용기목사는 50년대 말 불광동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60년 서대문에서였다. 이곳에서 그의 사역은 기존교회들을 흔들어 놓았다. 많은 신자들이 오전에는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서대문전도관의 성령대망회에 참여하였다. 여기에는 영락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신자들이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은혜를 경험한 신자들은 얼마 후에 순복음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조용기목사는 기존교회에 상당한 도전이었다.
조용기목사의 사역은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함께 발전하였다. 1961년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통하여 혁명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사회는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그 중심에는 영등포산업단지가 있었다. 영등포산업단지는 당시 한국의 최대 경공업단지였다. 조용기목사는 1972년 여의도로 교회를 옮겼다. 여의도는 바로 영등포산업단지와 인접해 있었다. 이곳에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공장 노동자들이 있었다. 조용기목사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박정희의 정치, 정주영의 경제, 조용기의 신앙이 어울려서 이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헌법에 이익공유제를 삭제하여 본격적인 시장경제 체재를 도입하였고, 정주영은 박정희와 함께 한국의 자동차산업을 일으켰다. 하지만 박정희와 정주영의 정치와 경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조용기의 신앙이다. 조용기는 좌절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소망을 전해다. 한국인들은 오래 동안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조용기는 첫째, 물질을 타부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가르쳤다. 중세 천주교는 물질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없었지만 개혁교회는 물질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 조용기목사는 한국사회에서 이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나 불교는 물질을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조용기목사는 물질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둘째, 조용기는 경제발전의 중요한 요소인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였다. 맑시즘은 사회문제의 근원은 기득권계층에 있는 것이고, 이것은 혁명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용기는 성령의 능력안에서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당신도 축복을 받아 중산층이 되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외쳤다. 조용기는 사회혁명을 통한 사회변화가 아니라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방 후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산업사회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진보그룹과 진보적인 기독교는 구조개혁을 통해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운동권에서는 공장에 대학생들을 투입해서 노동운동을 하게 하였고, 기독교에서도 도시산업선교회를 만들어서 이런 일들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조용기목사는 혁명을 통한 구조개혁보다는 오히려 자기절제와 근면성실을 통한 중산층 진입을 강조하였다. 어떤 운동권인사는 자신이 공장에 침투하여 활동할 때 여기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여전도사라는 말을 했다. 이들은 산업사회에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들을 투쟁보다는 기도와 인내로서 감당하도록 가르쳤다. 결국 순복음교회는 한국산업화의 위기를 계급투쟁이 아니라 건전한 청지기 윤리로 해결하도록 노력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