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탁월한 설교자는 누구일까? 대답이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설교나 교회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4세기 후반에 활동한 대주교 요한(John) 크리소스톰 (Chrysostom)이 탁월한 설교자라는데 공감한다. 그의 탁월한 설교 700여 편이 남아서 현대 독자들에게도 감동을 전한다. 그의 성경 강해는 물론 특별한 주제에 관한 설교는 지금도 공감을 얻는 탁월한 설교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범 기독교계의 존경을 받는다. 천주교에서는 그를 금구(金口)라 부르며 그의 강론을 높이 평가하고, 정교회에서도 그를 성요한 크리소스토모스라 부르며 성자 반열에 세운다. 그리고 개신교도 그를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가로 그를 존경한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아타나시우스, 대 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4대 동방교회 박사로 존경받고, 안디옥학파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부로 인정받는다.
위대한 설교자 크리소스톰이 설교하는 곳에는 좀도둑들이 극성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설교에 몰입된 사람들이 자기 소지품들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에 청중은 열광했고 그의 날카롭고 선명한 설교를 통해 죄가 드러난 황제와 황후가 이를 갈았다고 전한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한이었다. 그의 탁월한 설교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후, 그를 크리소스톰(Chrysostom/ Golden-Mouth)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크리소스톰은 헬라어로 "황금의 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톰이 현란한 미사여구나 자극적 언사를 사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하게 성경 말씀을 강해한 설교자로 정평이 나 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374년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쿤투스는 시리아 출신의 유능한 장군이었고 어머니는 안투사였다. 그러나 그가 2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20세의 젊은 어머니 안투사가 홀로 그를 양육했다. 요한 크리소스톰의 삶을 추적하면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몇몇 멘토들이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멘토는 그의 홀어머니 '안투사(Anthusa)'였다.
요한의 어머니 안투사는 훌륭한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미모와 교양을 갖춘 그녀가 20세에 남편을 잃자 그녀에게 구혼자가 많았고 당시 황제도 안투사가 자신의 고관과 결혼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안투사는 아들을 위해 수절했다. 안투사의 삶을 요한 크리소스톰의 인문학 스승이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인 리바니오스는 '놀라운 그리스도교 여인의 삶'이라고 평가했다.
요한은 어머니 안투사의 가르침대로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역 중에 여성의 지도력을 인정했고 여러 번 여성에게 중직을 맡겼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후대 여성 신학자들은 여성의 역할을 강조할 때마다 크리소스톰을 소개해왔다.
요한 크리소스톰이 일반 학교를 마치고 철학자와 수사학자를 배출하는 안디옥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서 철학 교수는 유명한 안드라가티오스였는데, 당시 그의 명성에 비해 요한 크리소스톰의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만난 수사학(인문학) 교수는 당대에 가장 탁월한 인문학자 중의 하나인 리바니우스였는데, 그는 크리소스톰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수사학(인문학)은 모든 지성인의 관심사였고, 아테네, 로마,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안디옥이 인문학 교육의 중심지였다. 크리소스톰은 든든한 어머니 후원으로 안디옥의 탁월한 수사학(인문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던 리바니우스에게서 수사학(인문학)을 배울 수 있었다.
리바니우스는 안디옥에서는 물론 로마 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던 정치가, 법률가로 수사학(인문학)의 권위자였다. 리바니우스는 고대 정신에 젖어 있던 인문학자요 예술가로 당시 안디옥의 청년들을 열광케 했고 많은 젊은이가 리바니우스를 따랐다. 다양한 학문과 교수의 경험을 가졌고 젊은이들의 추종을 받았다. 리바니우스는 A.D. 345년에 안디옥 수사학(인문학) 교육 위원장(the chair of Rhetoric in Antioch)에 취임하여 안디옥의 인문학 교육을 주도했다.
리바니우스는 인문학 발전에 상당한 이바지를 했다. 리바니우스는 탁월한 문필가로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Prolific writer)였다. 그가 남긴 편지 1600여 통, 64개 연설문, 96개 예비 수사학 연습문장 (Progymnasmata)은 고대 서신과 고대 수사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314년에 안디옥에서 태어난 리바니우스는 14세부터 안디옥에서 수사학(인문학)을 공부했다. 아테네로 유학을 갔던 리바니우스는 철학자 디오판투스(Diophantus the Arab)의 문하생으로 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마친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가 개인 교사로 수사학(인문학)을 가르쳤다.
리바니우스는 354년에 고향 안디옥으로 돌아와 수사학 교수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비록 불신자였지만 그는 많은 크리스천 제자들을 배출했다. 크리소스톰과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레 등도 그의 제자였다. 당시 리바니우스 영향력은 막강했다. 로마의 황제와 고관들이 리바니우스를 만나려고 안디옥을 방문했고, 로마 황제 줄리안과 데오도시우스와도 친밀한 교분이 있었다.
리바니우스는 탁월한 웅변가였다. 그가 남긴 연설문이 큰 사회변혁을 이룬 4세기에 사회 상황을 잘 전하고 있다. 바젤대학교 루돌프 브렌들레 박사는 리바니우스가 359년 올림픽에 즈음하여 자신의 고향을 찬미하는 "안티오키아"라는 제목의 공개 연설을 했고, 이것을 보완해 나중에 출판했다고 한다. 리바니우스가 얼마나 정교한 연설가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리바니우스의 문하생으로 인문학을 학습할 때 요한 크리소스톰은 두각을 나타냈다. 리바니우스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친구들이 그에게 가장 후계자로 삼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요한을 훔쳐가지 않았다면 그가 내 후계자다'라고 했다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탁월한 인문학 학생이었고 그 인문학적 소양이 그의 목회와 저작 활동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