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제 1법칙인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물체에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하고 있던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해 있고, 운동하고 있던 물체는 언제까지나 같은 속도로 운동을 한다는 법칙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 시작이 반이라고 했고, 또 등산이나 낚시에 맛을 들인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산과 바다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다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시작되어 계속 하다보면 가속의 힘이 붙어 다니엘처럼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고 어려운 기도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개척 교회가 왜 힘듭니까? 가속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이 왜 힘듭니까? 가속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가속이 붙을 때까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결정적인 어느 순간에 나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이 젊어서는 맘대로 살다가 임종의 순간에 예수 믿어서 구원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나의 내일이라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관성과 가속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미래는 오늘 가던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일을 예측하기 원하면 바로 오늘이 바뀌어야 합니다. 관성과 가속의 힘이 있기 때문에 어제라는 오늘을 제대로 못하면 오늘이 안 되고, 오늘이 안 되면 또 내일이 안 됩니다. 큰 배일수록 핸들을 꺾는 각도보다 회전이 훨씬 크게 돕니다. 그래서 자동차 핸들 꺾듯이 생각하면 사고가 나게 됩니다. 큰 배와 같이 더 많은 사명과 복을 받는 인생이 되려면 훨씬 더 회전 반경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가속의 힘 때문에 회전 반경이 커지므로 지금 마음먹는다고 그것이 바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미래는 그 때 한 번에 변화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느 쪽으로 가속이 붙느냐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내일 진짜 잘되기를 원하면 도움닫기로 뛰는 힘처럼 오늘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죄의 가속이 붙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은혜의 가속이 붙는 사람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1절 이하에는 말세에 고통 하는 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13절에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점점 더 죄의 가속이 붙어 더 악하여져서 돌이키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지금 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은혜의 가속이 붙어 내일도 계속 예배에 나오기가 쉽고, 지금 봉사하는 사람들이 계속 더 봉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끝까지 잘 지키면 결국 그날 하나님의 복과 승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으로 내 삶에 은혜의 가속이 붙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의 가속이 붙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