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크리스천투데이(CT)는 최근 '미래의 전염병에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2019년 12월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전염병에 돌입했을 때, 우리는 스페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의 유명한 이 인용문에 주목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우상을 강조할 뿐 아니라 전염병의 역사를 무시하는 선택의 양극화를 보았다. '가짜뉴스'라는 용어와 수많은 음모론이 자리를 잡는 것을 보았고, 또 다른 이들은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적인 목소리를 외쳤다.

이러한 예언적 목소리 중 하나는 호주학자인 스테판 테일러(Stephan Taylor) 박사다. 

테일러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코로나 이전 전염병에 대한 인류의 대응을 시간에 걸쳐 요약한 바 있다. 그리고 코로나19 파동이 닥친 후 과거 인간이 보였던 것과 동일한 반응을 예측했다.

우리의 목표는 지난 3년 동안 양극화된 감정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 결론은 전 세계적 혼란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더 큰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소망의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 코로나가 강타했을 때 에볼라가 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같이 전염병과 싸우는 많은 지역들과 달리 우리의 편안한 서구 사회는 불신으로 반응했다.

우리 사회는 전염병이 새로운 것처럼 행동했다. 아마도 그것은 현대의 우상으로서 과학과의학의 실패한 안정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질병의 역사는 심각한 전염병이 정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격리'라는 용어는 40일을 의미하는 라틴어/이탈리아어에서 유래했으며 성경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40일은 노아가 방주에 있고, 모세가 시내산에 있던 기간이다. 구약의 율법에서 나병환자는 제사장이 '깨끗하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40일 동안 격리됐다. 격리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대 용어조차 고대 격리의 친숙한 형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불러낸 나사로의 이름을 따온 '라자레타'에서 격리됐다. 고대에 이것은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떨어진 고립된 장소에 격리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요점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은 새로운 게 아니며 먼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코로나19 기간 많은 이들이 '전례가 없는' 정부의 통제에 반발했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는 다른 세대가 경험한 것을 성숙한 태도로 검토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통제에 대한 전례가 없었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끝없는 선례가 있다. 가정의 격리는 1690년대 최초의 천연두 발병 기간에 의무화됐다. 유럽을 퍼진 콜레라(1793) 때문에 선원들은 안전할 때까지 항구 밖에서 강제로 격리됐다.

테일러는 2013년 "이러한 통제가 1789년의 공격적인 시위를 일으켰다고 요약한 이탈리아 의학 역사가 에우제니아 토뇨티(Eugenia Tognotti)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노툐니는 "영국에서는 자유주의 개혁가들이 천연두에 대한 검역과 강제 백신에 모두 반대했다. 사회적, 정치적 긴장은 폭발적인 혼합물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유럽 국가에 영향을 미친 민중의 바난과 봉기로 걸정에 달했다"고 했다.

더 최근에는 2000년 사스(SARS) 전염병으로 3만 명의 캐나다인이 봉쇄됐다. 2014년 에볼라 위기 때는 아프리카에서 비슷한 봉쇄 사례가 발생했다. 성서 시대 이후 모든 정치적 입장을 지닌 정부는 통제를 통해 질병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다른 정치적 동기에 의해 변질됐다. 이와 같은 질병에 대응하는 정부나 사람들이 이를 가혹하게 여기는 것에는 새로울 게 없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다시 발생한 긴장일 뿐이다.

코로나 여정에서 백신 여권에 대한 가장 초기 언급조차도 사람들이 이 '새로운' 통제 시도에 겁을 먹었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가? 사실 그렇지 않다.

1400년대 그들은 질병이 여행을 통해 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Bills of Health'는 상인과 선원이 여행할 수 있도록 발급됐다. 'No Bill'은 항구나 마을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것은 종종 무장한 군대에 의해 시행됐다.

예를 들어, 토뇨티는 "1835년부터 1836년까지 무서운 콜라레가 유행하는 동안, 사르네냐 섬은 사람이나 화물을 해안에 내리려는 모든 배를 무력으로 막으라는 명령을 받은 무장한 이들의 감시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콜레라를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호주에서는 아시아 전역을 여행하는 시민들에게 황열병 예방 접종 증명을 요구했다. 같은 시기에 호주군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예방 접종을 받았다. 이 여권들에 대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메시지는 "질병은 우리 세계의 일부이며 그러한 질병을 다루는 것은 항상 갈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검역의 역사는 이러한 문제들이 모든 국가, 모든 정치 체제, 모든 사회 경제적 지위 및 이에 대응하려는 모든 시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에우제니아 토뇨티는 "이러한 전략적 조치는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및 윤리적 문제를 제기했다(계속 제기하고 있다). 극적인 건강 위기에 직면해 개인의 권리는 종종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혔다"고 했다.

이어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분리하기 위해 격리 또는 고립을 사용하는 것은 종종 겉으로 건강한 이들의 자유를 침해했으며, 대부분은 하층 계층 출신이었고 소수 민족 및 소외된 소수 집단은 낙인이 찍히고 차별에 직면했다"고 했다.

팬데믹은 새로운 게 아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새로운 게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덜 열정적인 게 아니라 이전에도 이러한 경험을 했고, 균형 잡힌 반응을 가져야 한다는 지혜로 대응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지혜의 일부는 항상 다른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탐색하려면 차분한 지혜가 필요하다. 과장으로 가득 찬 양극화된 반응은 이러한 지혜와 정반대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 높이 생각하고, 우리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새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를 반영하는 게 아니다.

다니엘 1장 2절에서 그것은 세상적인 혼란이라는 장막 뒤에서 이를 통제하시는 하나님을 엿볼 수 있다. 다니엘과 유대 민족은 바빌로니아 폭군에 의해 노예로 유배됐다. 그들의 삶은 망가진 것처럼 보였고, 그들의 거룩한 고향인 예루살렘은 파괴됐으며, 미래의 왕(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희망은 사막의 공기 속에서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2절은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에게 심판과 자비를 가져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음을 말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전대미문의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일으키셨다.

또 다른 예는 이 미래의 소망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끔찍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분은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죄와 죽음을 물리치신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당신을 신뢰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며 인내심을 갖고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신 것처럼, 전염병의 비극을 너머 이를 사용하시는 창조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