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Photo :기독일보) 시애틀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 동안 많은 일들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말입니다. 그런데 유독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오래 남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슬픔이 오면, 슬픔을 외면하거나 다른 가면을 쓰게 됩니다. 외면하면 당장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더 크게 터져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가면을 쓰는 시간이 오래 되면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슬픔을 삼킨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애써 외면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슬픔은 먹는 것이 아닙니다. 삼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병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슬퍼하되 기간을 두고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슬픔의 주인이 되게 되면, 슬픔을 품고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20년 전의 슬픔을 버리지 못합니다. 결국 그게 상처가 되고 트라우마가 되기까지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겪었던 슬픔이 그 사람의 인생에 슬픔이 주인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를 위해 소망 없는 자같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슬픔에도 제한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분노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으면 안 되듯이, 감정에도 제한성을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감정과 슬픔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겪는 슬픔인양 슬픔을 이용하고, 나중에는 자기 유익을 위해 선용하기도 합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범죄로 가진 아이가 아파 죽을 지경이 됩니다. 다윗은 금식하며 몸부림으로 부르짖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다윗을 본 신하들도 안쓰러워합니다. 7일 만에 아이가 죽게 됩니다. 신하들이 소식을 전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슬픔의 깊이가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신하들의 눈치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 씻고 먹고 슬픔을 벗어나게 됩니다, 신하들이 묻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구할 때까지만 나는 슬퍼한다고 말합니다. 슬픔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사명에 더 매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되, 기간을 두고 슬퍼한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었습니다. 죽어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하나님의 결정 앞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다윗을 축복해 주십니다. 솔로몬을 주시고 여디디아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얻은 자라는 뜻입니다. 힘들 때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그만 멈추라하면 멈추는 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주신 사명을 붙들고 매진해야 합니다. 잃은 자리가 축복의 자리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인 바라보고, 기간을 두고 슬퍼하되 제한을 두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축복하신 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