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2022년도를 돌아보니 참석했던 두 개 컨퍼런스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있었던 CAL(Called to Awaken the Laity) 세미나(Apr 25-30)요, 다른 하나는 선한 청지기 교회에서 있었던 MICA(Missional Church Alliance) 컨퍼런스(Nov 14-15)였다. 전자는 제자훈련 세미나였고, 후자는 미셔널 처치(선교적 교회) 세미나였다. 감사하게도 제자훈련 세미나에서 남겨진 질문, 즉 '제자훈련을 했음에도 왜 성도가 교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미셔널 처치에서 그나마 조금 찾을 수 있었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정재영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제자훈련이 지향하는 목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삶 속에서 신앙을 잘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훈련 후 실제로 나타난 변화는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개인 경건생활에 충실하게 되었다', 혹은 '가정에 충실하게 되었다'였다. 목표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간극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목표와 결과가 일치하기 위해서는 "실제 삶과 연관된 새로운 제자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는 제자훈련에 평생을 바치신 옥한흠 목사님이 이미 알고 제기하셨던 부분이기도 하다. 『평신도를 깨운다』에서, 옥목사님은 한국 교회 영적 성장의 부작용 3가지를 '허수, 허세, 허상'으로 보았다. 이 중 허상은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 때문에 나온 것으로 진단한다. 다시 말해 제자 훈련해서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교회를 키우는 방법론이 아니라, 예수의 온전한 제자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성도를 교회 안에만 머물도록 하기 위해, 교회만을 성장시키기 위해 제자훈련을 하는 것은 제자훈련의 본 목적이 아니다. 제자훈련으로 성도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아니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살 수 있도록 양육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세상을 아우르는 통전적 시각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우선 양육하는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 벽에 붙어 있는 사명 선언문은 이렇다. "예수의 온전한 제자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공동체". 이것이 제자훈련의 본질과 목표를 명확히 보여주는 표어라 생각한다. 제자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가 제자훈련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지금의 제자훈련의 모습 속에는 세상으로 나아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습이 약하다. 이 부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어떻게 교회 담장을 넘어서게 할 수 있을까?

제자훈련이 막혀 있는 담을 "미셔널 처치"로 넘어설 수 있다면 어떨까? 제자 훈련해서 세상에서 제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신앙생활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제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선교적 교회/성도"가 되는 길일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실천"을 강조했던 진보 진영의 논리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자"는 선교단체들의 논리가 묘하게 이어지는 맥락이라 할 수 있다.

MICA 컨퍼런스에 참석했던 분들이 마지막 시간까지 궁금했던 것은 '미셔널 처치가 무엇인가'였다. 하지만 핵심은 그것을 정의하는 데 있지 않았다. 함께 어울리고 network을 형성하는 데 더 무게 중심이 있었다. 그 말은 '선교적 교회'가 무엇인가를 먼저 정의 내린 다음 무언가를 실천하는 그런 순서가 아니란 말이었다. 서로 만나 밥을 같이 먹으면서, 교회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다 보면 미셔널 처치가 무엇인지, 현실적으로 교회를 살리고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제자훈련과 미셔널 처치의 공통 지향점은,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고 세상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제자로 살기 위해 살아 있어야 한다. '피투성이로라도 살아 있어야 한다'(겔 16:6). MICA 컨퍼런스에서 참석자 대부분이 신선하게 배운 인사이트 중 하나는 Neil Cole 교수가 강의 중 제시한 '잔디밭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죽은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살아있는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잔디에 물을 주자. 비록 작을지라도 아직 살아있는 잔디를 살리자. 그 잔디가 전체 잔디를 살릴 것이다.

복음은 이미 그 자체로 미셔널 처지를 지향한다. 복음이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가 복음에 역행하며,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제자훈련으로 은혜받고 살아난 성도가 세상 잔디밭으로 번져 나가자. 그것이 제자훈련을 제자훈련 되게 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미셔널 처치로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박준 시인의 시 중에 이런 표현이 있다.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새는 새장이 아니라 나무에서 살아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이 문장을 패러디 해 본다면, 교회가 성도와 함께 사는 법은, 교회에 성도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마당에서, 어느 목사님의 표현대로, "선교적 존재"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훈련과 미셔널 처치의 연대로 성도가 세상에서 온전한 제자 될 수 있기를 미약하게나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