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간청하는 사람은 모두 치유해 주되, 만나는 사람을 모두 치유해 주지는 않았다. 그분은 인간이 스스로의 고통을 끌어안을 권리를 인정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인간 자유의 존엄성에 대한 놀라운 믿음만이, 실로 끝간데 없는 금도만이 이 태도를 가능케 한다. (끝간 데 없는 금도= 남을 받아들일만한 끝없이 넓은 도량. 아량.)
그분은 유다의 죄를 드러냈지만, 그 악행을 막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강압적으로 당신의 생각을 믿게 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부자 청년의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했고, 떠나가는 그를 붙들지 않았다. 마가는 예수의 조언을 거절한 부자 청년에 대해 명민한 주석을 달았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막10:21)
정녕코 예수는 인간 자유데 대한 놀라운 존중심을 보여주었다. 그분은 결코 당신 생애에 온 세상을 회개시키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준비 안 된 사람들까지 모두 치유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 』(필립 얀시 Philip Yancey,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요단. P.144)
헨리 나웬(Henri Nouwen)은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페루의 빈민가에서 사역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페루 파견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역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두 가지 태도는 <죄의식>과 <구원 열망>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여기에서 태도란 사역자들이 일을 하는 출발동기를 말합니다.
"죄의식의 문제는 그것이 일을 통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죄의식은 어떤 봉사 행위로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뿌리가 깊습니다. 한편, 죄와 가난과 착취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 또한 마찬가지로 해로울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불철주야 일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그들의 임기중에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경우를 당합니다. 사역의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만 기대를 걸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존중심을 급속도로 상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