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혜암신학연구소 편집고문). ⓒ혜암신학연구소 제공
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혜암신학연구소 편집고문). ⓒ혜암신학연구소 제공

1. 풀 사이에 핀 작은 꽃들이 내게 묻는 말

벌집 같은 현대 주거 공간 아파트 단지 둘레길을 걷다 보면, 울타리 노오란 개나리 꽃보다 먼저 피고 지는 모란꽃을 보면서 봄이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그렇게도 곱고 깨끗한 모란 꽃잎들은 무엇이 바빠서 그렇게 빨리 지는가 아쉬운 맘이 든다. 대도시의 소음, 탁한 공기, 맘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비로운 대자연의 정화작용(淨化作用)이요 치료제라는 생각이 들고, 수준 이하의 정치계 뉴스에 상한 맘을 위로받는다.

사람들은 나이 들어 오십 세가 지나가면 점점 모란, 국화, 장미, 벚꽃, 진달래 등 사람 눈에 많이 뜨이고 사랑받는 크고 화사한 꽃들보다 수풀에 가려진 작은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 역시 그렇다. 요즘 산책길의 기대감과 즐거움은 풀잎들 속에 가려 숨겨져 있는 작은 꽃들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어떤 놈들은 크기가 참깨 보다도 작은 것도 있다. 색상도 가지가지다. 하얀색, 보라색, 빨강과 노랑색 등 다양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꽃으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꽃잎, 꽃잎받이, 꽃가루... 번식은 풍매(風媒)인줄 알았는데, 벌이나 나비가 아닌 모기같이 작고 여린 날것들이 종종 그 앙증맞은 꽃잎 위에 앉는 것을 본다. 충매(蟲媒)라니 더 호기심이 든다.

요즘 필자는 늙은이 축에 드는 나이에 들어, 풀잎들에 가리워져서 평소 눈에 잘 뜨이지도 않던 그러한 작은 꽃들 앞에서 숙연한 마음과 공경의 맘까지 들어 맘속으로 옷깃을 여미곤 한다. 그 작은 생명의 꽃들이, 그 누군가 봐주던 말던 하나의 생명체로서 최선을 다해 자기를 실현하는 그 성실성 앞에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 작은 꽃들의 단아한 모습, 작고 여리지만 당당한 모습, 남과 비교하지도 않고 바쁘게 허둥대지 않는 모습, 조용히 기다리고 작은 아름다움을 향유하면서 자기를 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 등이 호모사피엔스 나를 향해 질문한다: " 왜 호모사피엔스님들은 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싸우시나요? 왜 그렇게 모질게 서로 죽일 듯 얼굴근육을 경직시키며 다투시나요? 우리는 모두 허허막막한 대우주 공간 속에 떠돌고 있는 탁구공보다 작은 행성(行星) 위에서 잠깐 노닐다가 가는 길동무들이 아닌가요?"

2. 테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본 인간현상

이번 달 필자의 칼럼은 풀숲에 가려진 채 피어있는 작은 꽃들에게서 새삼스럽게 '존재의 충격'을 받아 20세기의 명저 중 하나인 『인간현상』을 남긴 예수회 신부요 고생물학자(古生物學者)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tdin, 1881-1955)이 강조하는 '인간현상'(phenomenon of man)을 되새김 하려고 한다.

한국 신학계에서 '안테나'라는 별명을 얻었던 서남동 교수는 언젠가 말하기를 "본 회퍼와 테야르 드 샤르댕은 20세기 신학의 광맥이 될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실 그랬다. 그 두 사상가의 글을 접할 때 우리는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기독교 진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테야르 드 샤르댕은 한국 기독교 신학사의 제1세대에 속하는 김재준과 함석헌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먼저 명심할 점은 테야르 드 샤르댕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신학자가 아니라 지질학과 고생물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자연과학자라는 점이다. 그는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 페랑 지역의 가톨릭 예수회(Jesuit) 영성교단에서 신학 수업을 받고 신부 서품을 받은 사제(司祭)였다. 그의 평생 과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성숙한 현대인의 과학적 세계관과 오랜 인류의 지혜의 샘터인 종교적 신앙과의 화해와 통전(統全)이었다.

테야르 드 샤르댕의 입장은, 지구의 생물 역사 과정 중에 출현하여 작금 지구 행성을 온통 뒤엎고 기후 붕괴, 생태계 파괴, 바이러스 팬데믹, 그리고 핵폭탄 자멸 행위로까지 위협하는 '인간현상'을 자연과학적 연구방법과 이성적 관찰에 기반하여 '인간현상학'으로서 일단 연구하자는 입장이다. 물론 테야르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와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에 관해 말하는 신학적 견해를 피력한 신부이지만, 그의 신학방법은 변증신학 계열에 속한다.

그렇다면 테야르 드 샤르뎅이 본 '인간현상'은 어떤 현상인가? 인류가 우주와 지구 속에서 살면서 그것들과 자신과의 관계성에 관한 사유방식에서 3단계의 커다란 변동 혹은 전회(轉回)가 있었다. 그 첫째는 16세기 초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에 의해서 제창된 지동설(地動說)이다. 그 둘째는 18-19세기에 최대로 발달한 생물들의 발생(發生, genesis)에 관한 사상과 모든 문화체계, 종교, 철학, 사회제도와 이념 등 인간의 정신적 삶의 규범들이 역사성을 지닌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상의 충격이었다. 그 셋째는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이 준 충격이었다. 진화론은 이제 단순히 생물의 진화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더욱더 복잡화되고 유기적으로 얽혀들면서 하나의 통일체로서 미래를 향해 진화한다는 세계관을 형성했다.

그 사람이 현대인인가 아닌가는 위 3가지 관점을 철저히 이해하고 자기의 삶의 철학으로서 얼마나 소화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보통 사람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이미 지동설을 배우건만, 일상생활 속에서는 여전히 천동설(天動說) 세계관에 익숙해서 살고 있다. 자기가 그 안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고 경험한 특정한 가치체계와 이념이 언제인가 과거 어느 시점에 발생했고 역사 속에서 형태를 갖추어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기 가치관이 항구불변한 것이라고 믿고 요지부동 충성하면서 독선 독단에 핏대를 올리며 살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론을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고, 인류 전체가 공동운명체로서 지금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야 할 것인가라는 '큰 생각'을 할 줄 모른다.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선진국들은 아직도 자기 국가중심의 패권의식에 사로잡혀 군비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비극에서 보듯이 21세기 백주 대낮에 어처구니없는 지역전쟁을 서슴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냉전시대 의식에 사로잡혀 정치계와 사회의식은 케케묵고 낡은 좌파·우파 논쟁 아니면 지방 의식, 파벌 의식, 당파 의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테야르 드 샤르댕은 오늘날 지구행성 위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인류들을 향해서 눈앞에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것들에 몰입하지 말고, 현대인답게 우주 속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좀 더 크게, 멀리, 넓고, 깊게 생각하자고 간곡하게 권한다.

3. 광막한 우주 시공간 속에서 지구행성과 그 표면에 살고 있는 인류집단

현대 자연과학 특히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이 밝혀준 바처럼, 우주는 대략 135억 년 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물질에너지의 대폭발(Big Bang) 이후 지금도 팽창과정에 있다. 한국이 산업화를 시작하기 전까지, 시골의 밤하늘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살던 작은 지방 도시 광주시 도심 주택가 마당에 놓인 평상에 누워 여름밤 하늘을 바라보면 총총히 빛나는 무수한 별들과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엄숙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현대 지질학에 의하면 지구의 탄생 시기는 지금부터 약 45억 년 전이며, 테야르 드 샤르댕에 의하면 그 45억 년 동안은 크게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지질권(地質圈,Geosphere)이 형성되던 시기, 그 다음 생명권(生命圈, Biosphere)이 형성되던 시기, 그리고 그 생명권 진화과정이 임계점에 이르러 '생각하는 힘'을 가진 생명체가 출현하고 그 중에서도 "생각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반성적 사유능력"(reflexive consciousness)을 지닌 인간이라는 호모종들이 나타난 후, 지구행성을 덮어가고 있는 정신권(精神圈, Noosphere) 형성기가 그것이다.

테야르 드 샤르댕은 영국 BBC방송 기자와의 대담 가운데서 자기 사상은 다음 같은 3가지 명제로 압축표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i) 지질권(물질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생명 출현이다.

(ii) 생명권(생명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인간 출현이다.

(iii) 정신권(인간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인류가 점차적으로 더욱 긴밀히 사 회화 해 가면서 한몸을 이루어 간다는 현상이다.

위와 같은 3가지 명제로서 자기 사상을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단순한 철학적 명상의 결과이거나 억측이 아니라, 우주 특히 지구 역사를 면밀히 과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발견한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복잡화-의식의 법칙'(Law of complexity-Consciousness)이다. 진화는 시간상으로 미래를 향해 계속 진행하면서, 언제나 물질의 구조와 구성소들의 배열이 더욱 복잡화해가고, 거기 상응하여 의식(정신)은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이론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테야르 드 샤르댕의 모든 사상을 기초하는 밑돌인 "복잡화-의식화 법칙"은, 피조세계가 태초부터 물질과 정신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데카르트의 '물질/정신 이원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잡화-의식의 법칙"은 엄존하는 물질계와 생명계의 다양한 현상을 귀납적으로 연구한 결과로서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적 우주질료' 안에 장차 물질과 정신으로 꽃피어날 양면적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그것을 테야르는 사물의 외면성(Without)과 내면성(Within)이라고 명명한다.

4. 수렴해가는 인류진화는 일심(一心, unanimity)을 이뤄가는 사회적 연대감과 개별적 개성화를 병행한다.

오늘 칼럼에서는 테야르 드 샤르댕의 중요한 사상인 오메가 포인트, 우주적 그리스도, 오메가 포인트의 현존성(現存性)과 미래에 나타날 종말적 성취 등 언급은 지면이 허락지 않으므로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 한다. 다만 테야르에 의하면 "진화 과정은 생명의 출현과 생각(사고)의 발생이라는 두 임계점을 거친 후 불가역전의 경향성(定向性)을 지니면서 사회화의 증대를 통하여 인류 안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회화, 일심의 형성, 창조적 수렴, 인류의 한몸 형성은 정치경제 조직적 결합구조의 복잡화 과정만 가지고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인간의 자발적인 창조적 협업, 봉사, 사랑 같은 높은 인격적 인력(引力) 없이는 이뤄지지 않고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에서 보듯이 단순한 인간 개성과 개별성의 의미를 무시하는 집단주의만 남게 된다. 반대로 자유주의 체제라고 총칭하는 사회는 자유라고 하는 가치를 지킨다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빈부 양극화 현상과 극단적 이기주의가 횡횡하여 건전한 인간사회의 수렴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 점이 오늘 인류가 처한 딜레마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생물학자들은 생물을 종(種)으로 분류한다. 인간은 영장류과(침팬지, 고릴라, 우랑우탄, 유인원 등) 중 하나에 속한다. 약 250만 년 전부터 30만 년 전까지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 말고도 지구표면에 직립보행하며 원시적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human, homo) 무리들이 있었다. "호모 속(屬)으로 분류되는 특징 있는 유인원"이란 뜻이다. 호모 엘렉투스(직립인), 호모 네안데르탈인(네안데르탈 골짜기에서 온 인간), 호모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쪽의 유인원) 등이다. 그 중 가장 늦게 출현한 인간 종류가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슬기인)이다. 유인원이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었지만,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사피엔스'가 약 20만 년 전에 지상에 출현하여 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거치면서 지금 지구표면을 온통 덮고 있다. 이것이 테야르가 본 '인간현상'이다.

인생에서 귀중한 것은 다름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에 후회 없이 몸과 맘을 바쳐 살아가는 일이다. 내가 누리는 오늘의 삶이 지난날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의 밑거름 위에서 피어난 꽃임을 깨닫는 것이 진정 성숙한 인간이다. 광대한 우주 안에서, 탁구공보다 작은 행성 위에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신화나 동화가 아니라 사실이고 부정 못할 진실이다.

오늘 칼럼 시작을 아파트 산책 길가에서 만난 단아하게 피어있는 작은 꽃을 보고 신선한 충격과 나 자신의 몰골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시작했었다. 글을 마치면서 구상 시인의 "풀꽃과 더불어"가 문득 생각난다. 독자들과 함께 시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

풀꽃과 더불어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 具常 시집 『造化 속에서』, 14-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