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으로 분단된 가운데 북한 정권의 공산화 진행은 더욱 구체화 되고 제도화 되어갔다. 한반도는 그것으로 분단의 비극이 종결된 것이 아니라 더 큰 민족의 불행이 잉태되고 점화되고 있었다. 그러한 첫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 동족상잔의 전조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1946년 10월 대구폭동 사건과 1948년 제주 폭동과 같은 해에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을 비롯한 남한의 공산주의 세력 등장과 그 영향력의 확대가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심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1948년 소련은 38선 이북 지역에서 군정을 끝내고 군대를 철수하면서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도 요구함에 따라 그해 12월 미군도 이남에서 철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6월 29일까지 철수가 완료되었다. 이로 인해 남한은 군사력의 공백기를 맞게 되었고, 미국 정부는 1950년 1월 12일에 국무장관이 '에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 방위 범위가 한반도를 제외시킨 일본만 포함된다는 대외군사방위선을 공포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남한의 이승만 정권과 국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김일성에게는 낭보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결국 김일성은 남침의 대내외적 여건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었다.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과 중공 모택동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1950년 6.25일 남침 직전에 전쟁 수행에 지장을 줄 목사 100여 명을 검거 구속하였다. 이들은 1946년 3월 토지의 무상 몰수와 분배 개혁에 교회의 부동산을 몰수하려는 것을 반대하며 협조하지 않는 목사들이었다.
1950년 6월 27일에 서울이 점령되고 7월 20일에는 대전을 함락시키고 얼마 후 낙동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런 중에 6월 27일 소련 유엔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려 한국 파병을 결정하였고,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의 한국 파병을 명령했다. 이례적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도 중앙위원회 발표를 통해 유엔의 한국 지원을 찬성했다. 곧이어 9월 15일에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했다. 곧 이어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10월에는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다. 이 당시에 평양의 교회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지에 대해 평양에 거주하였던 목회자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은 주일이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남조선이 38선을 넘어 전쟁이 발발하였다며 시시각각 전투 상황을 평양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보도하였다. 이날 낮 예배에 모인 평양 '용화동교회'에서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그동안 겪은 고통에 대한 각오가 비쳤고 또 찾아올 자유에 대한 기대감도 보였다. 그 어느 누구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심전심으로 전쟁은 반드시 미군이 지원하는 남한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고 공산당이 조만간에 패망하고 북한에 완전한 자유가 오는 제2의 해방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국군이 전면 퇴각하고 있다는 전황이 시시각각 들려왔다.
6월 29일 낮에 처음으로 미 공군 B29 폭격기 편대가 평양성 상공으로 날아와 동평양 비행장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그후로는 거의 날마다 미공군 폭격기가 날아왔다. 평양시는 그야말로 불바다가 되어 많은 교회들이 파괴되고 불에 타버렸다. 미군의 폭격을 피하려는 교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가 아주 적었다. 7월 9일 주일 새벽에 김세진 목사는 예배를 드린 후에 긴급 당회를 열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교회를 임시 폐쇄하기로 하고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 생활이 여러 달 지속되었다.
10월 19일이었다. 평양에 유엔군이 입성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러자 김세진 목사와 교인들은 평양 시내로 돌아와 폭격으로 파괴된 교회당을 청소하고 피난에서 돌아온 성도들과 함께 10월 22일에 가족과 20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감격스런 주일 예배를 드렸다. 마치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너와서 첫 제사를 드리던 때와 흡사한 감격이었다. 무너진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교인들은 그동안 공산 치하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하였던 교회 중건을 서원했다. 그들은 맘껏 전도하고 자유롭게 봉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공산 치하 5년을 뒤돌아보면서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는 기도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