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홀은 그의 남편 의사 선교사인 윌리엄 제임스 홀이 평양에서 청일전쟁에서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보다 과로와 전염병으로 쓰러져 서울로 옮겨져서 그의 아내와 아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1894년 11월 19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로인해 그녀는 평양의 최초의 여의사 사역자이며 최초의 28세의 평양의 외국인 미망인이 되었다. 로제타 홀은 다음 달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는 조선과의 영원한 이별을 위한 출국이 아니라 다시 오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숭고한 죽음을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평양에 근대식 병원을 세우기 위한 모금 활동을 하였다.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조선의 의료사역의 필요성을 강변하였고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당시 조선에서는 맹인들은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멸시당하며 버려진 인생들이었다.
이를 누구보다도 아프게 지켜보았던 로제타 홀은 조선의 맹인들이 문맹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점자 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 교육을 받았으며 조선식 점자를 만들어 내었다. 로제타 홀은 평양에서 조수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동 부부(박에스더)를 함께 데리고 가서 그녀를 볼티모아의 의과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박에스더는 우리 의료계의 최초의 서양 전문의가 되어 돌아와 평양에서 로제타와 함께 의료 사역을 하게 된다.
로제타 홀은 평양을 떠난 지 3년 만에 다시 돌아와 이북지역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기홀병원'을 크게 건축하여 평양 주민들과 그 지역의 조선인들을 위한 생명을 살리는 귀한 사역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유복자였고 미국에서 태어나 데리고 온 딸 에디스 마거리트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남편의 뒤를 이어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되자, 그녀로서는 슬픔과 고통은 감당키 어려운 아픔이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오히려 평양의 많은 어린이들이 전염병으로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어린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그 병원에 어린이 병동을 건축하였다.
한편 1900년에는 6년 만에 의사가 되어 돌아온 로제타의 제자인 박에스더가 평양에 와서 로제타 홀과 함께 의료 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로제타 홀의 조선에서의 사역은 43년이나 지속되었으며 그 사역 중에 빼어 버릴 수 없는 평양에서 어린 맹인들을 위한 맹아 학교를 만들어 저들에게도 근대식 교육과 신앙을 심어 주었다. 평양 주민들은 이같이 헌신적인 봉사에 감동이 되었고 그로 인해 복음이 평양도성 곳곳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로제타 홀을 '평양의 오마니'라고 불렀다.
로제타 홀은 자신의 생애에만 의료선교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셔워드 홀을 캐나다로 보내어 아버지가 공부했고 교수로 있었던 '토론토의과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 아들은 8년 만에 의사가 되어 돌아올 때에는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한 '메리안 홀' 과 결혼하여 1925년에 조선으로 함께 귀국하여 조선인들의 생명을 살리는 데에 2대에 걸쳐 4명의 부부 의사 선교사로서 헌신하였다.
아들 부부 선교사는 평양으로 가지 아니하고 그 당시 조선인들에게 광범위하게 만연된 결핵을 퇴치하기 위해 황해도의 결핵 병원으로 가서 그곳에 결핵전문 병원인 '구세요양원'을 건립하고 1932년에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Christmass Seal)을 발행하여 결핵 퇴치를 위한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시켰으며 이를 통해 무수히 많은 조선인들이 회생의 삶을 살도록 헌신하였다.
그는 1940년 크리스마스 실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는 등의 이유로 일본 헌병대가 간첩 혐의를 씌어 강제 추방시켰다. 그의 가족은 조선을 떠나면서 부두에서 해주 결핵병원의 직원들이 수놓아 만들어 준 태극기를 꺼내어 온 가족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작은 쪽지를 꺼내어 미니 해스킨즈(Minnie L. Haskins) 시인 'Gate of the Year'를 낭독했다.
"나는 년(年)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네.
빛을 주시오.
그래야 내가 미지의 세계로 안전히 걸어 들어갈 수 있소.
그는 대답했네.
어둠에 들어가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오.
그러는 것이 빛보다 나으며 안전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