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신학대학원 선교학 최성봉 교수
(Photo : 기독일보) 센트럴신학대학원 선교학 최성봉 교수

과연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1년여년 전 막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주변의 성도님들이 이러한 시대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를 목회자들이 전해 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적지 않게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 시대의 중심지점을 통과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질문을 가지고 이런 저런 묵상과 상념에 잠기었다는 것은 총체적이며 단 하나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늘 칼럼에서는 그 중에 일부분을 나누고자 한다.

말세의 현상

성경은 우리가 사는 차원의 시대에 종말이 있다고 말한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선포한다. 끝이 오면 심판과 구원이 시행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며, 그 나라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말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신화나 대부분의 종교들이 가지는 어떤 신학적 틀의 한 이야기로 들려질 것이다.

성경에는 그러한 시대가 다가올 때 몇몇 현상(전쟁, 기근, 전 세계적 대재앙 등)이 표적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경종을 삼아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절대자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가던 죄악의 길을 멈추고 돌이킬 것에 대해 말한다. 그 중에 전염병의 창궐과 많은 사람들이 사망에 이를 것을 말하기도 한다(계6장,  겔 14:21). 마치 코로나 상황이 오버랩이 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럽의 흑사병의 대창궐 같은 현상은 주기적으로 있어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점은 이러한 재앙과 어려움이 더욱 심화되고 전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특정 싯점과 시간을 종말로 집중하며 지나친 두려움에 빠지거나 혹은 냉소적 무관심에 빠져 살기보다는, 종말론적 지평에서 현재의 삶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성경적 경종이며 요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상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 이후 종말은 시작되었다.

일상에서 간과해서 안되는 현상

성경은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팬데믹과 같은 세기말적 재앙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관련된 종말의 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4:5-6)"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종말을 상징하는 관용어이다. 부모와 자녀간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앙적 측면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표현하며,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 팬데믹은 이러한 측면에서 먼저 믿는 자들의 신앙의 본질,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게 하는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한 집사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재택 근무를 하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봉사를 하지 않는 가운데 이상한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가장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와 봉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의 본질,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튜닝을 하는 가운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자유함의 반대편에서 헷갈리게 하는 이상함은 우리가 평소에 가져왔던 예배와 봉사와 교제의 관성적 틀에서 벗어남으로 인한 것임이 분명하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심(信心)을 유지하고 돈독하게 하는 수많은 외적 행동들에 함몰된 채 믿음의 관계를 유지한다고 혹은 좋은 신자라고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틀에서 잠시 벗어나 지내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하는 이 시간 가운데, 이 마저도 제대로 튜닝하지 못하면 개인적, 공동체적 위기는 이 혹독한 팬데믹의 종료 이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가정의 회복

팬데믹의 현상 중 또 하나는 이상한 동거이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분주했던 부모님과 학교와 친구의 관계 속에서 동상이몽(同床異夢)을 가졌던 부모와 자녀 간에 이상한 동거가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평소 바쁜 시간의 틀 속에서 제대로 얼굴조차 보기 힘들고, 서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거야 믿었던 가족 관계 속에서 삼시세끼를 함께 하며 가족애를 나눌 인생 일대의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 단절이 있고 장벽이 있음을 발견하고 당혹해 하는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부지중에 커져 버린 그 괴리감이 너무 커서, 식사 시간 외에는 얼굴 조차 보여 주지 않고 홀로 방 안에, 혹은 컴퓨터와 스마트 폰으로 무한대의 커뮤니티와 교제를 선택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부모는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어쩌면 펜데믹의 일시정지 상황에서. 삶과 관계의 본질적 온상이 되는 가정이, 평소에는 깨닫지 못하고, 이상히 여기지 못했던 가족 관계의 이상 현상을 감지하는 자는 복된 자일 것이다. 거기에서 나아가 그 관계의 본질을 깨닫고 회복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가정은 축복된 가정일 것이다.

글을 맺으며

팬데믹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를 먼저 보낸 슬픔을 당한 분들이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할 때 진정한 자유와 감사에 이르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한 혼돈과 아픔은 여전히 혼재한다. 그리고 그 여파는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여러가지 이슈들 역시 쉽게 판가름 낼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회복의 본질이 필요한 두 가지 점에 대해 잠시 나누어 보았다. 절대자 앞에서 깊은 자기 성찰과 자신에게 주어진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핵심적 관계망 속에서 진정하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회복되어지는 것이 절실하다.

이것은 코로나로 인한 삶과 죽음의 이슈만큼 중요한,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을 얻고 누리고 나누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자신은 믿음 안에서 살았다고 믿는데 실상은 죽음 믿음이라면 이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며, 생명 관계의 모판이 되는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녀 간에 단절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생명을 공유할 수 없다.

팬데믹의 공포는 상호 관계와 교제라는 생명 유지 및 공급 장치를 단절시키고 있다. 이제 서서히 사회적 관계망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지만, 관계의 본질적 성찰과 실제적 회복 없이 우리는 다시 분주한 종교적, 사회적 분주함에 젖어 들고 말 것이다. 일시정지 상태에서 우리는 점검하고 회복하고 현재적 미래를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최성봉 교수는 센트럴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전 몽골리아 선교사로 사역했었고, 현재 샌디에고 갈보리 장로교회의 부목사이며 Acts 0108 Ministry 대표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