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향한 손양원 목사의 3가지 경고
1. 회개하라: 지난날 행실에 대한 성찰 요구
2. 공산주의: 무신론과 유물론에 대한 경고
3. 재림신앙: 내일 영생과 소망을 위한 경고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이사장 정주채 목사, 회장 이성구 목사)는 6일 오후 함안 칠원교회(담임 최경진 목사)에서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개최했다. 해당 예배는 순교 70주년인 지난해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올해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이상규 박사(백석대 석좌교수)가 '한국교회를 향한 손양원 목사의 (3가지) 경고'를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상규 교수는 "오늘 우리 사회나 한국교회는 매우 혼란한 가운데 처해 있다. 국가적으로 정체성이 흔들리고 안보가 불안하며, 공정과 정의가 무너지고,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고 있다"며 "무엇보다 이념 갈등이 심각하다. 어떤 이들은 해방 공간보다 더 심각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당시 손양원 목사님의 눈에 비친 그 시대와 그 시대를 향한 경고가 오늘 동일할 수 있는 이유"라고 전제했다.
이 교수는 "그래서 오늘은 손양원 목사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며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신 손 목사님은 해방과 함께 출옥해 1950년 9월 순교할 때까지 만 5년간 활동하시면서 크게 3가지 경고를 하셨다"고 소개했다.
1. 회개하라
첫 번째 경고는 '회개하라'이다. 그는 "회개는 그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회개하지 않음이 모든 화(禍)의 원인이라 보았고, 회개치 않음에 대해 경고했다"며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좌우 대립이 심각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기득권에 집착해 회개와 자성, 쇄신운동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이상규 교수는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인 제36회 총회는 불명예스럽게도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경찰이 투입될 정도로 교권 대립이 심각해, 결국 정회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며 "그날 한반도 전역에 내리던 비는 불길한 징조였다. 인민군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30일 한강 도하를 시작했다. 두 달 만에 부산과 경남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적의 수중에 놓였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손 목사에게 '인민군이 그냥 두지 않을테니 피하라'고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나병 환자들을 섬기다 9월 13일 인민군에 체포됐고, 2주일 동안 끌려 다니면서 고초를 당하다 9월 28일 미평 과수원에서 48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며 "그가 9월 13일 수요 예배 설교를 준비하다가 잡혀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그 선포되지 못한 설교가 바로 '한국에 미친 화벌(禍罰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 설교에서 손양원 목사는 6.25 동란을 "4천년 역사상 초유의 신벌(神罰)"로 규정하고 우리 민족에게 미친 이 화(禍)와 벌(罰)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범죄하고도 회개치 않음"을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①국가 지도자들의 범죄 ②백성들의 죄, 곧 민족적 범죄 ③미 군정의 잘못된 영향 ④한국교회와 신자들의 책임 등을 지적하면서, "6.25 전쟁은 기독교의 죄값이다.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손 목사는 또 "기독교인들이 기도가 부족했고, 전도가 부족했고, 정치권력을 추구하고, 미국이 보내준 구제품을 두고 추태를 보였고, 자유주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다"며 "특히 총회 석상에서 목사 장로들이 난투극을 벌인 일이 화의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이상규 교수는 "설교의 요지이자 결론은 '회개하지 않음이 화의 원인이므로, 오늘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며 "회개를 외친 그의 설교는 평온한 설교가 아니라 절규였고, 회개를 요구하는 마지막 호소였다. 그는 세례요한처럼 '회개하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고, '회개가 살 길'이라고 경고했다"고 했다.
▲이상규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
2. 공산주의를 멀리 하라
두 번째 경고는 '공산주의를 멀리 하라'는 것이다. 그는 "손양원 목사는 공산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무신론, 유물론과 거짓, 위선, 이중성, 선동 등 공산주의의 실상과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불신앙임을 인식했다"며 "그래서 손 목사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것이다.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고 우려했다.
이상규 교수는 "이념적 싸움이 한창이던 해방 정국에서, 손 목사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피력했다. 해방 당시만 해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적절한 제도인 듯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손 목사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했다"며 "손양원 목사는 집회를 다니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설교했고, 공산주의가 위험한 사상이자 기독교 신앙과 반하는 무신론 사상임을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그가 반공주의를 말할 때는 6.25 전쟁 전으로, 공산주의를 체험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때였다. 그럼에도 그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를 신봉하게 된 것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며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이를 잘 몰랐기에, 공산주의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한 가지 사례도 소개했다. 1947년 봄 지금의 제일영도교회에서 집회할 때의 설교 내용이다.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의 정신입니다. 민주주의는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먹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랑으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그는 "손양원 목사가 말한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였다. 그가 말한 것은 신민주주의도 아니었다. 신민주주의는 통합과 합작을 중시하며, 미국식이나 소련식 민주주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선 안 된다는 일종의 중도적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손양원은 철저한 미국식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이는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좌익들이 볼 때 손양원은 친미주의자였다. 그의 두 아들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보수 친미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던 손양원은 결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고, 그의 죽음을 통해 공산주의의 거짓과 만행을 폭로한 것"이라며 "지금 우리나라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사라지고, 거짓 위장과 선동이 난무하고, 친공산주의가 백주에 서울 도심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기에 손양원 목사의 경고는 오늘 우리를 향한 경고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손양원 목사의 경고가 의미 있었다는 점은 6.25 전쟁을 통해 드러났다. 인민군 치하 3개월 간의 서울 생활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하고서야 알게 된 것"이라며 "그래서 이후 신학교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고, 정규 교과 과정에 포함돼 있었다. 공산주의를 멀리하라는 경고는 지금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고 했다.
▲행사 후 기념촬영 모습. |
3.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
세 번째 경고는 '다시 뜨거운 가슴으로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는 우리의 믿음 없음 곧 불신앙을 경고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었다"며 "손양원 목사는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롬 14:23)라고 확신했다. 그가 나환자들의 목회자가 된 것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도 믿음을 따라 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는 "그래서 그는 '옥중 생활 4년이 많은 날들이지만(獄苦四年多多日) 주와 함께 즐거워하니 그 모든 날이 하루 같다(與主同樂如一日)'고, '감옥 생활에서도 주와 동행하니 항상 기쁨이 충만하다(與主同居恒喜滿)'고 고백한 것"이라며 "해방과 함께 출옥한 그는 혼란한 정국과 교계의 무질서한 처신을 보면서, 믿음으로 행할 것을 설교하고 서로 자기 이(利)를 구하다 사랑이 식어지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런 삶의 자세로 원수된 자를 양자로 입적시키는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 교수는 "손 목사는 특히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고 경고했다. 해방 후 그는 특히 재림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살았다. 해방 후 혼란한 상황에서, 그는 재림을 고대하며 설교하고 가르쳤다. 이런 연유에서 '주님 고대가'가 널리 불려졌고, 손양원의 작시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라며 "손 목사가 이 노래를 즐겨 부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 노래 가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바 있는 전점용 전도사가 하동 지역에서 개척 전도자로 일하면서 작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손 목사의 재림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는 "해방 후 순교하기까지, 손양원 목사는 재림과 그 때에 대한 준비를 촉구했다. 순교 신앙도 이 재림 신앙에 근거한 것"이라며 "재림이 분명하기에 순교적 삶이 가능하고, 순교 신앙도 파지할 수 있었다. 손 목사는 '주 예수의 강림(降臨)이 불원(不遠)하니, 저 천국 얻을 자 회개하라'고 외쳤다"고 이야기했다.
끝으로 "손양원 목사는 해방 후 혼탁한 사회와 교계를 보면서 깨어 회개하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경고하셨다. 그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하다"며 "돌아보면 그의 3가지 경고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고 정리했다.
'회개하라'는 경고는 우리의 지난날의 행실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경고는 오늘의 현실에서 '무신론과 유물론에 대한 경고'이며, 세 번째 경고는 내일의 우리의 영생과 소망을 위한 경고라는 것이다.
이상규 교수는 "오늘 우리 시대는 해방 전후의 상황과 비슷하다. 사회적 혼란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교계의 무질서, 그리고 코로나 상황이라는 이름 하에 당연시되는 나태함은 우리 실상을 노출하고 있다"며 "오늘의 현실은 우리는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세상 연락(宴樂)을 구하는 오늘 우리에게, 손양원 목사는 다시 경고하고 있다. 깨어 기도하고 마음을 돌이켜, 거짓된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주의 재림을 사모하라고"라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는 1부 감사예배와 2부 추모행사 순으로 진행됐다. 감사예배는 회장 이성구 목사 사회로 이사 구신회 장로의 기도와 칠원교회 남성중창단의 찬양 후 이사장 정주채 목사가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 32:7)'는 주제로 설교했다. 이후 손양원 목사가 즐겨 부른 '주님 고대가' 찬양 후 이종승 목사(한국성시화운동협의회 대표회장)가 축도했다.
2부 '손양원 목사님을 그리며'에서는 함안군 조근제 군수의 환영사, 함안군의회 이광섭 의장의 감사인사 후 경남동부보훈지청 한국성 지청장과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박종희 목사, 경남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박시영 목사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이후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가 '나의 아버지 손양원', 손양원기념관장이자 외손자 박유신 목사가 '나의 할아버지 손양원'을 각각 증언했고, 이상규 교수가 강연했다. 행사는 최경진 목사의 기도로 마무리됐다.
▲중동중학교에서 열린 故 손양원 목사 명예졸업식에서 장녀 손동희 권사가 졸업장을 받는 모습. ⓒ크투 DB |
故 산돌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교회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출생, 1914년 칠원 보통공립학교에 입학해 1919년 졸업한다. 이 무렵 맹호은 호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919년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가 3.1운동 주동자로 체포당해 마산 형무소에 투옥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마산 창신학교에 편입한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스가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고, 21세 때인 2년 후 귀국해 정양순(본명 정쾌조)과 결혼한 뒤 진주 경남성서학원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주기철 목사를 만나 순교 신앙을 배운다.
1925년 졸업 후 부산 감만동 나환자 보호시설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나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매켄지 선교사를 만나 감명을 받는다. 이후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양산읍교회, 원동교회 등을 다니며 순회 전도사로 봉사하다 1935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3년 후인 1938년 3월 16일 33회로 졸업한다.
경남노회 부산지방 시찰회 순회전도사로 파송받아 부산과 김해, 양산과 함안 등을 다니며 14개월간 활동했으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유로 해임당한다. 1939년 7월 15일 여수 애양원교회 교역자로 부임했으나, 1년여 만인 1940년 9월 25일 신사참배 거부로 체포당한다.
해방 3일 후인 1945년 8월 17일 만 5년간의 투옥 생활을 끝내고 석방돼 가족들과 다시 만난다. 나환자 시설인 애양원으로 돌아간 그는 1946년 2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 반란사건이 발생해 좌익 학생들에 의해 두 아들인 손동인과 손동신을 잃었다.
그는 두 아들을 죽인 범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즉결처분 직전이던 그를 살려내 양자로 삼았다. 이후에도 애양원교회에서 목회하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피난 권고를 거절하고 교회를 지키다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해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