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신학자이면서, 목회사역을 항상 겸비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데, 청교도들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갖췄었다. 필자는 "청교도가 답이다"는 주제를 담아서, 2020년도 말에 『청교도, 사상과 경건의 역사』 (세움북스)를 출판했다. 과연 오늘의 시대에도 청교도의 신앙 유산으로 목회를 잘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쓴 책이다. 청교도는 도서관의 고문서로 남아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은 희미한 과거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무슨 청교도 신앙이냐고 비판적인 선입견을 갖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제발 차분하게 청교도 사상과 저서들을 공부하기를 추천한다.
신학자로서의 탁월한 연구와 목회 사역을 통해서 미국에서 청교도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분이 죠엘 비키 박사다. 그는 미시간 주 칼라마주에서 태어나서, 그 도시에 있는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했다. 필자는 칼빈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에 칼라마주에서 한인교회를 섬긴 적이 있었고, 한인 유학생들을 섬기고자 웨스턴 대학교에 자주 방문했었다. 칼라마주에서 한 시간 운전하여 북쪽 방향으로 차를 달리면 그랜드래피즈 시에 도착한다. 그 주변 일대는 네델란드 이민자들의 텃밭과 같은 곳이다. 필자가 칼빈신학원에 공부하고 있을 때에, 주일날 영업을 하고 있던 대형 마켙 "마이어" 앞에서 수백 명의 기독교인들이 주일성수를 주장하면서 데모를 한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교회 공동체가 도시를 주도하는 곳이다.
인구 18만 명이 살고 있는 그랜드래피즈라는 중소 도시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독교 대학교가 다섯 개나 있을 만큼 교육도시이자, 네델란드-아메리칸들의 도시이다. 이들 이민자들은 교육열이 남달랐다. 1879년에 세워진 칼빈대학교와 칼빈신학대학원을 비롯해서, 카이퍼 대학교, 코너스톤 대학교와 미시간 신학대학원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30분 운전해 가면, 진보적이며 포용주의를 용납하는 "호프 대학"과 그 자매 학교인 "웨스턴 신학대학원"이 있는데, 네델란드 이민자들의 교단(R.C.A.)이 세운 대학교이다. 이처럼 화란 이민자들 사이에서 진보파, 보수파 , 온건파로 나뉘었고, 각각 학교를 세워나가고 있다.
이처럼 명문 기독교 대학이 많은 그랜드래피즈라는 도시에다가, 죠엔 비키 박사를 중심으로 "청교도 개혁신학대학원"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이 1995년에 세워졌다. 청교도들과 네델란드 개혁교회는 깊은 유대를 통해서 박해를 견뎌냈었다. 네델란드 개혁교회의 뿌리는 청교도들의 신학사상과 동일하다. 1550년대에 영국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서 바다 건너에 있는 네델란드로 숨어야만 했었다. 예를 들면, 미국으로 건너온 "메이플러워"호에 승선한 브라운파 청교도들은 영국 사람들이지만, 네델란드에 피신해서 십여 년을 살다가 다시 신대륙으로 건너 온 사람들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였던 토마스 카트라잍은 네델란드의 안트워프로 피신을 갔다가 난민들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했었다. 그의 제자 윌리엄 에임즈는 아예 네델란드에 건너가서 돌트 총회에도 참석했고, 프라네커 대학교수로 큰 기여를 했다. 이처럼 두 나라의 개혁교회들은 교류가 긴밀했었다.
그랜드래피즈 시에는 화란 이민자들 중에서, 극소수의 보수파가 명맥을 유지해 내려오면서 "해리티지 개혁교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다. 새로운 지도자 비키 박사의 부임과 함께 조그만 신학교를 세워서 재도약하고자 시도하였다. 비키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마쳤는데, 그의 졸업논문은 칼빈으로부터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확신이라는 요소가 일치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켄달이 받은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사이에 일치성이 없다고 주장하여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논박하는 정통 개혁신학의 입장을 개진한 것이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난 후, 죠엘 비키는 홀로 신학교 교수 겸, 그랜드래피즈 시에 있는 "해리티지 리폼드 교회"도 맡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굴곡을 안고서 내려오던 이처럼 작은 교단에 소속된 교회 숫자는 10여 개뿐이다. 이들은 순수한 성경 말씀만을 선포한다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화란 이민자들의 교회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화란어로 설교를 했었고, 목회자들도 대부분 네델란드에서 건너왔었다.
2차 세계 대전 후에, 많은 화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성실하고 사업성이 탁월한 화란 이민자들은 뉴욕과 뉴저지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인디애나 주, 아이오아주, 일리노이주, 카나다 해밀톤, 런던, 온타리오, 그리고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 일대는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삼던 화란 이민자들이 새로 터전을 일구면서 살아가고 있다. 1879년에 칼빈신학대학원이 세워졌고, 독특한 화란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천 여개의 CRC 교단 소속 교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바, 상담학과까지 포함해서 재학생수가 370여 명이다. "칼빈대학교" 외에도 이 교단에 소속된 대학들(Redeemer University, Trinity Christian College, Dordt College, The King's University)이 많다. 같은 화란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이미 그랜드래피즈에서 "칼빈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새로이 "청교도 개혁신학교"를 세워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랜즈래피즈에서 살았던 필자의 무지함을 깨우는 역사가 일어났다. 조엘 비키의 탁월한 교수사역과 목회로 인해서 불과 25년 만에 박사과정까지를 인가받았고, 풀타임 교수진이 10명에다가 강사진이 20명에 이르고, 전세계에서 온 재학생이 250여 명이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4년에 본관 건물 3백만 불을 헌금으로 완공했고, 2014년에 부속건물을 또다시 3백 6십만 불에 완성했다. 모두 다 헌당 예배 직전까지 수많은 기부자들이 건축 대금을 완납하여주는 두 번의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비키 박사는 개교 25주년 예배에서 감격했다. 오직 순수하고 올곧은 청교도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가 승리하고 있는 열매와 결실들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해리티지 리폼드 교회"는 1908년에 교회 부속으로 세운 "플리머쓰 기독교 학교"를 운영해 오고 있는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오백여 명이 재학 중이다. 또한 비키 박사는 여기에다가 새로운 출판사, "종교개혁 해리티지 출판사"(Reformation Heritage Publication)를 세웠고, 청교도들의 명저들과 그외 수많은 연구서들을 출판하고 있다. 그랜드래피즈시에는 이미 어드만, 존더반, 베이커 등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출판사 3대 회사가 막대한 출판사업을 하고 있다. 이 출판사들의 역량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며, 전 세계를 향해서 다양한 신학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특히, 존더반에서는 NIV 영역 번역 성경을 칼빈신학대학원 교수진들의 도움으로 만들어냈고, 밀리언 달러를 신학원에 기증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순수한 기독교 경건서적들은 "종교개혁 해리티지 출판사"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