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니라(에베소서 4:15-16)".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 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어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22-25, 30)".

에베소서 4장은 교회 성도들의 생활의 실제적 지침이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사역이나 직분, 조직과 성장에 있어 조화와 통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통일성이란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유기적으로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특히 17-32절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설명하며, 예수쟁이로서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로서의 믿음을 지켜 나아가야 할 지침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쟁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학사전에서 '쟁이'는 다양한 뜻이 있다기보다는, '쟁이' 또는 '장이' 할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는데, 첫째로 '그것을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입니다. 예를 들어 '멋쟁이, 겁쟁이, 고집쟁이' 등이 있습니다.

둘째로는 '그것과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그림쟁이, 이발쟁이, 사진쟁이, 글쟁이' 등이 있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쟁이'는 기독교 신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쟁이'는 예수를 믿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당시 크리스천들을 예수쟁이라고 불러도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쟁이'라는 표현은 당시 시대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직업인들을 지칭해 사용했습니다. 당시 기술이라고는 물건을 고치는 사람들, 미장이, 이발쟁이, 땜장이, 사진쟁이 등이 있었습니다.

반면 은행이나 학교, 병원에서 일하는 이들, 그리고 판검사 등 고위 공무원들은 공부를 많이 했던, 모두 부러워하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과 달리, 낮은 계층의 직업인들의 말끝에는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으로 '쟁이'라는 말을 붙여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쟁이'라는 말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쟁이'라는 말도 이 시대 들어 사라져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예수쟁이'라고 부르던 그 시절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낮잡아서 쓰는 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뜻으로도 해석됐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쟁이'라 불러도 대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부드럽게 대했던 기억이 피어오릅니다.

당시 예수쟁이들이 모인 교회에서는, 종소리가 '예수, 천당'처럼 울려 퍼져 비신자들에게도 많은 울림이 됐습니다. 시계가 귀한 시절이라, 시간을 알리던 아련한 추억도 전해집니다.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주일이면 틀림없이 빨간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교회를 향해 나서는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웃집에서는 교회를 나가는 '예수쟁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어 미소 가득한 모습으로 "잘 다녀오라"고 하면서, '나도 교회에 나갔으면' 하고 저마다 한 마디 할 때는 참으로 기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전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아쉬움이 가시처럼 마음을 찌르곤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시고, 응답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입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으로 시작된 예배를 통해 열린 구원의 복음의 길이 땅 끝까지 또는 모든 열방에까지 전파되길 원하시며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지켜주시는 보호자이자 인도자가 되신 성령님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세상에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게 됐습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 즉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와 사랑,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들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세우시며, 예수쟁이들과 함께 교회를 시작하신,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신비의 공동체 인 것입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참으로 무게가 있었고, 깊이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심을 다하여 드리는 충성된 예배는 실로 감동이었으며, 하늘 문이 열리는 순전한 예배였던 그 시절 모습은 지금 시대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듯,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 못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특히 요즘 100세 시대를 맞아 세상에서 누리고픈 장수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하고 사모해야 하지만, 세상의 방법대로 몸에 좋다는 보약을 찾아 헤매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저분들이 참된 '예수쟁이들'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수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킬 것을 명령한 십계명 다섯 번째 계명에 있습니다. 인간을 향해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장수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 바울서신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3)".

전도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시절, '예수쟁이들'은 부모에게 효도했고 사회질서를 지켰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함께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가난하고 소외되며 고단한 삶으로 불행한 이들을 위해 도움을 외면하지 않고 나서서, 그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예수쟁이들'의 뜨거운 열정으로 세상은 어둡지 않고 밝았으며, 복음은 쉼 없이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지금은 전도가 힘든 시대라고 모두 말합니다. 하지만 전도를 힘들게 만든 사람은 '예수쟁이'가 아니라 '종교인들' 아닐까요?

'예수쟁이'가 많았던 시절 신자들은 서로 양보심이 많았고 사회질서에도 앞장섰으며, 어려운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나누는 삶을 잃지 않고 베푸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런 '예수쟁이들'이 있었기에, 비신자들도 '예수쟁이들'만큼은 신뢰했고, 비록 종교는 달라도 친구가 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당회를 보십시오! 비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자신의 영욕을 위해 애쓰는 데만 집착하며, 돌아보아야 할 이웃에게는 차가운 시선으로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위해 일하지 않는 종교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거침없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자고 하지만,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은 두 눈 뜨고 찾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나 직장을 다니시는 분들조차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한 거짓말과 시기와 모함, 심지어 사기까지 치지 않습니까? 그렇게 비신자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오늘날 종교인들 때문에 '예수쟁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실이 아닐까요?

'예수쟁이'로 살아가려면, 데살로니가후서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대로 이뤄진다면, 사라졌던 '예수쟁이들'이 다시 나타나는 귀한 시대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 시대는 교회는 나가지만, 예배의 참된 중심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채 교회 마당만 밟는, 갖은 세상의 짐을 예배 시간으로 끌어들여 과다한 무게로 예배의 참된 본질을 망각하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은 아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건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은혜대로 살지 못하고 이기주의와 탐심, 불순종으로 주신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살아가려 안간힘을 씁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질서까지 무너뜨리는 시대가 되어, 자연의 파괴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본성까지 내다버리는 슬픈 시대가 되었습니다.

의사 김세현이 쓴 <인체 정화 건강혁명>에 의하면, 5%는 의사가 고치고 95%는 내 몸이 고친다고 합니다. 약 먹고 병원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몸은 스스로 회복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람들이 고통 없이 잘 살아가도록 하셨지만, 에덴의 낙원에서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낙원의 질서를 파괴 하므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방법 대신 자신의 의지와 방법대로 살아가려 발버둥치다, 인간 스스로 타락에 길을 선택해 버렸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유형의 바이러스로 고통을 당할지 두려울 뿐입니다.

그저 단순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예수쟁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장수의 비결이요, 믿음을 지켜내는 비결이며, 세상에서 승리를 이루는 길입니다.

나를 유혹하는 교만과 탐심, 이생의 자랑과 권력, 그리고 구원과 아무 상관없는 세상 놀음에 심취되어 쓸모없는 바벨탑을 쌓아가는 종교인들은, 하루 속히 죄의 늪에서 빠져나와 참된 예수쟁이로서의 삶을 드러내는 신실한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