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시편 91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전염병이 돌 때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전염병에 대해 무슨 교훈을 줄까? 성경 검색프로그램에서 '전염병'을 치니 몇 구절이 나온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시편 91편이다. 3, 6-7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이 구절을 읽을 때, 그리스도인은 큰 위로를 받는다. 설교자가 써먹기(?)에도 너무 좋은 구절이다. 김정우 교수(총신대 은퇴)의 『시편주석』에 따르면, 이 시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참호(塹壕)의 시편(trench psalm)'으로 사용되었다.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불안, 두려움, 숨막힘, 식은 땀, 어지러움, 신체의 마비 등을 느꼈지만, 이 말씀을 묵상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구절을 단순하게 적용해선 안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도 분명 전염병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 19의 경우에도 신천지 집단에서 대거 발생했지만, 정통교회 성도 중에도 걸린 사람이 없는게 아니다. 부산, 서울, 수원, 부천 등지의 교회에서도 확진자가 다수 있다.
역사를 살펴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전염병에 걸린 적이 있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인 루터와 칼뱅의 시대에도 수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전염병으로 인해 죽었다.
시편 91편에 대한 마귀의 적용과 예수님의 적용
전염병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시편 91편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까? 쉽지 않다. 그런데 시편 91편이 마침 신약성경에서 인용되고 있다.
마태복음 4장 이하다.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세 차례 시험(유혹)을 받으신 사건이다. 그 중에 두 번째 시험을 보면, 마귀가 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리고 덧붙인다.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여기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는 마귀의 말이다. 마귀 주제에, 감히 성경을 인용한다. 공교롭게도 마귀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시편 91편 중 11-12절이다.
마귀가 말하는 대로, 아니 시편 기자가 말하는 대로, 설령 우리에게 재앙이 닥쳐도, 위험이 발생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시는가? 뛰어내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7절)".
예수님께서 차라리 뛰어내리셨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증명되고, 시편 91편 11-12절의 약속이 실제라는 사실도 증명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마귀의 성경해석에 오류를 지적하신다. "말씀을 가지고 함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함부로 적용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도리어 그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시편 91편에 담긴 의미를 바르게 활용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시편 91편에 대한 바른 적용
시편 91편은 위험하게 사용될 소지가 있다. 잘못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구절들을 부적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믿음을 넘어 맹신과 미신이 되어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우리는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에서도 신자를 지켜주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어떤 구체적인 증거로 확인하려는 시도나 그 증거로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 대한 바른 적용
전염병의 시기가 되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 역사를 근거로 제시한다. 14, 16세기 흑사병이 전염되던 시기를 예로 든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드렸다는 것이다. 딱 좋은 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며, 범주 착각의 오류다. 교회 역사는 중요한 참고점이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이라는 일반은총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진전이라는 관점에서 그 시대를 해석해야 한다.
흑사병과 코로나19는 전염병이라는 공통점 외에 아무 공통점이 없다. 무엇보다 전염 방식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의학은 20세기에 급격한 발전과 변화를 경험했다. 인류가 질병의 원인을 발견한 것은 1860년대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게 1928년이다. 인류가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은 1950년대 전자현미경이 등장한 이후의 일이다.
의학의 발달은 우리의 인식도 변화를 주었다. 그런데 2020년에 16세기 의학에 근거한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류에게 허락하신 일반은총을 무시하는 일이다. 16세기 흑사병 때, 신앙인들이 어떻게 했느냐를 단순하게 적용하는 것은 교회사 문자주의다.
14, 16세기 신자들이 흑사병이 돌 때 교회당에 모여든 것은 비판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 범위 안에서 이뤄진 당연한 일이다. 아직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기에, 도무지 알 수 없던 시절에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태도였다. 그들에게는 믿음에 근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만약 오늘날에도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믿음 없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전염병의 원인과 전염방식을 알고 있다. 그것을 빨리 퇴치시킬 수 있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로 그런 의학적인 방법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조심할 수 있다. 이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성경 그리고 상식과 이성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중요시한다. 또한 동시에 상식과 이성, 성도의 분별력을 중요시 여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절; 29장 6절).
사람이 합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위험에 자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듯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
사탄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시험할지 모른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전염병으로부터 지키실 거야. 근데 왜 다함께 모여서 예배 안 드려? 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니?"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뜻과 작정 가운데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허락하셨다. 또한 의학의 발전도 허락하셨다. 마스크도 주셨고, 손 세정제도 주셨다.
말씀대로 행하되, 또한 동시에 의학의 권면도 무시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약을 만드셨고 우리에게 주셔서, 그 지식으로써 우리 몸을 지키고 보호하여 건강하게 살도록 하셨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다. 이 전염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아직도 예배 논쟁 중이다. 우리 하나님을,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예외까지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좀생이'로 만들지 말자.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특강 예배모범』(흑곰북스)
『설교, 어떻게 들을 것인가?』(좋은씨앗)
『성화, 이미와 아직의 은혜』(좋은씨앗)
외 다수 기독서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