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에 본 영화들에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남녀의 사랑은 많은 영화의 주제나 소재가 되는데, 하나는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었고, 또 하나는 시간을 극복하지 못한 사랑이었다.
첫 번째 영화에서는 다른 시간대를 살던 두 사람이었지만 운명의 소용돌이를 만나 결혼을 한다. 이들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사랑하고 다투며 울고 또 이별하지만, 이어진 끈을 따라 또 만나기도 한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이었다.
두 사람이 폭풍 같은 사랑을 하는 가운데 심하게 다툰 어느 날, 대화 중에 여자가 묻는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자 남자는 이미 용서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난 당신이 미래에 할 일들까지도 이미 용서했어."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찌 들으면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말일 것 같다. 앞으로도 너그럽게 용서하겠다는 말로 들리는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이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궁극의 용서는 인간이 줄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이 남자의 말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다투고 또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른다. 일방적이지만 크리스천도 주님 앞에 죄를 짓는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번 그 죄들을 고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한 톨의 죄도 용납될 수 없는 천국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숨 쉬는 것도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우리 처지이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랑이신 그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관계다. 그러므로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이 했던 대사를 쓴 작가는 아마도 주님의 속죄 원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용서는 말처럼 쉽지 않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모두 용서하겠다고 미리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 사랑해서 앞으로 어떤 잘못도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러고 싶다는 뜻이니까 뜨겁게 사랑한다는 표현일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대속의 은혜가 한 번 우리를 비추면 영원히 우리 생명이 봉인되듯이, 그 남자의 사랑은 그래서 안전하다.
2
두 번째 영화는, 사랑하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갈등하는 연인들의 이야기였다. 생활에 치여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던 두 사람은 점점 지쳐갔고, 급기야 여자는 떠나게 된다. 처음에 갈 테면 가라지 하던 남자가 급히 따라가 보지만 이미 놓쳤다.
지하철역으로 가 보니, 그곳 종점에서 문이 활짝 열린 텅 빈 지하철이 출발 전이었다. 이리저리 살피다 보니 여자가 밖을 보고 한 문 앞에 서 있다. 여자는 안에, 남자는 승강장에 서서 바라본다. 여자는 내리지 않고 쳐다만 보고, 막상 따라온 남자도 올라타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한다.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짧은 시간이 지나간 뒤에, 지하철은 문을 닫고 서서히 출발한다. 내려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가와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서로 바라본 채 두 사람은 떠나고, 떠나보낸다. 서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로.
긴 세월이 지난 뒤 두 사람은 고향 가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열차는 폭설로 멈추고 둘은 대기하는 시간 동안 지난 얘기를 나누게 된다.
여자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오지 않는다. 남자는 성공해서 생활고를 해결한 뒤에 그녀를 찾지만 여자는 그 소식을 알고도 돌아가지 않았고, 남자는 결국 포기한 채 결혼을 했다.
3
두 영화는 마치 이상과 현실을 대비시키는 것 같다.
사랑을 하다 보면, 용서하기 힘든 일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래도 첫 번째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사랑이 충만하면 용서하게 된다.
용서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신적인 무한 용서는 어렵겠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사랑을 철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끝없이 굳건한 사랑을 베풀면, 그 마음을 역으로 이용해 일부러 멋대로 행동하거나 일탈을 하지 않을까 염려할 수도 있지만, 상대방도 사랑한다면 오히려 스스로도 성실한 사랑을 유지하고자 애쓸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이용해 고의로 방종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분의 참된 신부가 아니듯이 말이다.
하지만 용서란, 현실을 그린 영화에서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멋지고 숭고한 사랑은 이상을 그린 영화의 엔딩과 함께 끝나고 만다. 관객이 감동했다고 현실에서 그런 사랑이 가능한 게 아니다.
사람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말로는 할 수 있어도 실제로 다 잊을 수는 없고, 용서했다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뿌리 깊은 증오와 복수심을 키워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폭발할지 모른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어서, 완전한 사랑이 없듯 완전한 용서도 없다. 그저 참을 뿐이다.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참고, 미루고, 또 기억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렇게 모든 생이 지나가면 그것이 사람에게는 최선의 용서일 것이다.
용서는 단지 잘못을 잊어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큰 사랑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우리 죄에 대한 처리는 그 자체보다 원인이 중요하다. 그 원인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 없이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혼의 서약에는 항상 어려운 때를 대비한 질문이 들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은 기상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잘못도 용서할 준비가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는 대개 사랑을 준비한다.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을 줄까 계속 고민한다. 하지만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사랑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을 준비도 안 된 거다. 본인이 용서받을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이나 마찬가지다.
시작하는 때에는 찬란함과 장밋빛 로맨스를 꿈꾸지만, 사랑은 원래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일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통과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마음먹어도 막상 닥치면 하기 힘든 것이 용서인데, 준비조차 하지 않는다면 행복을 꿈꿀 자격은 없는 것이다.
사랑이 달콤하기만 한 꿈이 아니라 해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살 필요는 없겠지만, 진지한 용서의 시간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비와 눈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를 용서하는 사랑, 그것이 참된 사랑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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