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발표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을 때 너무 기쁘고 즐거웠다. C. S. 루이스(Lewis)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모두 흥미로운 작가들이고, 많은 생각들을 자아내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두 신학자들의 신학을 풀어냄으로써(unpack), 설교자들이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기회를 마련해 만족스럽다."
'복음주의 대표적 지성'으로 평가받는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Alister E. McGrath)가 1일 새문안교회(담임 이상학 목사)에서 진행된 '2019 5차 서울 C. S. 루이스 컨퍼런스'에 이어 3일 열린교회(담임 김남준 목사) '2019 제7차 조나단 에드워즈 컨퍼런스'에서 기조강연 뒤 남긴 소감이다.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그가 만든 조어(造語)인 과학신학(Scientific Theology)과 판타지 소설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많은 저작들을 남긴 맥그래스 교수는 이 외에도 무신론부터 이신칭의까지, 다양한 질문에 답했다.
-'이신칭의'가 이 시대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하신 적이 있는데, 오늘 발표에서도 에드워즈의 해석과 적용에 대해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오늘날 한국 상황 속에서의 번역과 해석에 대한 고견을 나눠달라.
"번역이란 단순히 언어와 언어를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오늘날 문화의 요소와 그에 맞는 접촉점을 찾아서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다. C. S. 루이스는 그 일환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국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발견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심장을 움직여 복음을 이해시킬 수 있는 이미지(image)와 이야기(story)를 발굴해야 한다. 제가 영국에서 했던 것도 그런 작업이었다. 같은 신학적 콘텐츠라도, 영국의 콘텍스트(context)와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번역은 상황(context)과 상대(counterpart)를 전제로 하는데.
"영국의 상황으로 예를 들어보겠다. 영국에서는 왕가(royal family)의 인기가 엄청나다. 제가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설교하고 여왕과 악수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엄청난 특권처럼 느껴졌다. 제가 자격이 있어서 악수한 것이 아니라, 여왕께서 제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사인(sign)이 될 수 있다.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각 나라와 민족들의 독특성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역설적인 상황이다.
현재 기독교가 직면한 도전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각각의 문화나 민족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에 대해 더욱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과학자 출신으로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복음을 어떻게 '번역'해 전달해야 할지 나눠달라.
"인공지능(AI)이나 과학기술 발전은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나쁜 도구도 될 수 있다. 과학기술 발전이 갖는 역설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유익을 줄 수도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오늘날 AI는 여러 문제와 과제를 던지고 있다. 과학기술이 지나치게 발전하다 보면, 사람의 본성마저 바뀌어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온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고, 저도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다. 계속 함께 깊이 고민해야 할 내용이다."
-무신론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
"기독교가 가진 '지적 매력'이었다. 대학에서 여러 학문을 접하면서, 무신론이 생각했던 것만큼 실재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면 기독교는 바깥의 눈으로 보이는 현상뿐 아니라, 내면의 경험들에 대해서도 좋은 이해의 틀을 제공해 줬다.
지적인 면에서 기독교가 가진 '정합성(整合性, 무(無)모순성-편집자 주)'이 회심의 시작이었지만, 저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윤리적·미학적 측면과 상상력 등 모든 영역을 살폈고, 기독교가 가진 설득력에 매료됐다."
-전(前) 무신론자(Atheis)로서, <만들어진 신>을 쓴 신(新)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비판하는 저서를 내셨는데.
"리처드 도킨스에 대해 제기했던 비판의 핵심은 3가지였다. 먼저 도킨스는 '자신이 이해한 기독교'를 비판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보통의 기독교와는 다른 것이었다.
둘째로 도킨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했지, 기독교 사상 자체를 비판하지 못했다. '기독교 사상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폄훼하고 비난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설득력이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도킨스가 나름의 기준으로 기독교인을 비판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함을 증명하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다면, 도킨스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야 한다. 자기 자신도 하지 못하는 걸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 아닌가. 도킨스가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할 수 있었을까?
2012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토론이 진행됐다. 당시 영국 성공회 캔터배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와 도킨스의 토론이었는데, 당시 초점이 바로 도킨스가 믿는 바를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느냐였다.
도킨스는 토론 마지막에 '나는 불가지론자(agnostic,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편집자 주)로 남아야겠다. 내가 믿는 것조차 증명할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킨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도킨스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수 없으리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남에게 믿는 바를 입증해야 한다는 책임을 강조하다 보면, 역으로 본인 역시 입증할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한국에 있는 무신론자 또는 불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두 가지다. 먼저 저 자신이 무신론자였을 때, 무신론이 옳다는 걸 입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가진 무신론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라, 신앙이나 신념 체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됐다.
제가 처음 무신론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 무신론이 옳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신론조차 하나의 신앙 형태일 뿐이라면, 무신론보다 나은 어떠한 신앙이 제가 살고 있는 삶과 현실, 그리고 우주에 대해 좀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리라는 것을 기대하게 됐다.
무신론자였을 때 그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견해가 굉장히 황량하고 어두웠지만, 일단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신론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 선택지들을 고려하고 비교하기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회에서 보통 제기되는 질문은 이것이 정말 영향력을 미치고 변화를 주고 실제로 작동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 믿음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각자의 개인적 이야기를 일종의 간증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를 전달하면서, 기독교가 말뿐이 아닌 실제로 역사하는 신앙임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 삶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간증할 때,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생각의 일부분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변혁시킨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 교회에 대한 희망적 전망을 펼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성적 관점에서 신앙에 대한 입증 자료를 분석했다면, 오순절 교회에 있는 제 친구들은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신앙적 경험들을 이야기했다. 경험이란 위험할 정도로 주관적인 것이지만, 그런 경험이 삶에 대한 관점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오순절 교회 구성원들은 상대적으로 주류로부터 벗어난 이들이다. 지성적 접근이 안 된다면, 경험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오순절 교회의 생존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사회적·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조금 더 신앙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까.
역사학자로서도 20세기 초반 오순절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역사가들은 처음 20세기 초반 미국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났던 부흥 운동에 관심이 있었는데, 15년 전부터 비슷한 운동들이 남미와 인도 등 세계 전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아주사 거리보다 이전에 일어났기에 나름 의미가 있다."
-위 오순절 관련 내용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 나왔다. 20년 전 나온 이 책을 지금 다시 쓴다면, 내용이 달라질까.
"결론 부분은 다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고, 책을 썼던 20년 전에는 없었던 의문들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20년 전에는 SNS가 없었다. 요즘 사람들은 페이스북 등에서 자신의 즐거운 모습을 노출하지만, 삶은 실상 어두운 경우들이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가 핍박당할 때, 삶의 애매모호함이나 고난으로 인한 어려움들이 신앙에 의해 안정을 찾았음을 강조하고 싶다. 책을 다시 쓰게 된다면,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는 애매모호함과 난해함 등에 신앙이 '안전판'을 줄 수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근대성의 부정적 차원과 싸웠던 신학자인데, 오늘날 탈근대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에드워즈는 기독교 신앙이 합리적임을 주장하면서도, 우리의 이성이 전달할 수 있는 차원을 초월하는 면도 있음을 강조했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를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고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을 언제나 초월해 계신다. 둘째로 기독교 신앙은 결국 경험의 차원이 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차원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는데 있어, 에드워즈는 큰 유익을 안겨줄 수 있다. 신앙의 합리성을 부단히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에 호소하고, 그 합리성을 거부하는 정신에 대항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 교리, 하나님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그 기초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에 대응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에드워즈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중요한 접촉점을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성뿐 아니라 감정과 상상력까지 움직이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에드워즈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우리의 생각뿐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지정의 모두 -편집자 주)' 변화를 이룰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 개개인을 위해 독특한 이야기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에드워즈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인가.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보다, 우리의 상황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은데, 첫째로 에드워즈는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이 아니다.
청교도 신학은 영국에서 시작된 내용들을 미국적 상황에서 꽃피운 것이다. 그것에 18세기 미국이라는 컨텍스트가 있다면, 21세기 한국의 컨텍스트에서는 청교도 신학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까. 이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중요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청교도 신학을 18세기 미국에서 적용했는지 지켜보면서, 21세기 한국의 청교도 신학 적용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청교도 신학을 어떻게 재현하고 적용시킬지 구체적으로 고민하면 좋겠다.
둘째로 에드워즈는 당대 여러 사상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반응을 보여준다. 그는 18세기 문화를 지배했던 여러 개념이나 사상들에 대해 분명히 확인하고 대응했다. 에드워즈가 제공하는 그 신학적 틀로써, 21세기 한국 상황에서 우리를 지배하려는 여러 사상과 문화들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