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역대 최단 기간 국내 1천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운 화제의 마블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 2019)>을 다룹니다.
영화는 아이언맨(토니 스타크,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 크리스 에반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헐크(브루스 배너, 마크 러팔로),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 스칼렛 요한슨), 호크 아이(클린트 바튼, 제레미 레너), 앤트맨(스캇 랭, 폴 러드), 워 머신(제임스 로즈, 돈 치들), 캡틴 마블(캐럴 댄버스, 브리 라슨) 등 슈퍼히어로들이 악당 타노스(조슈 브롤린)와 최종 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안소니 루소와 조 루소가 메가폰을 잡은 러닝타임 3시간의 이 영화는 '엔드게임'이라는 제목답게 마지막 대사와 쿠키영상, 결말과 스포일러 등이 다양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본 칼럼에는 다소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전향한 살인자: 나타샤 로마노프, 동료를 위한 희생
토니 스타크의 죽음의 복선, 이른바 사망 플래그(death flag)는 <아이언맨 1>의 대사에서부터 나온다. 사람들을 구하러 아이언맨 수트를 입겠다는 토니 스타크와 그를 말리는 페퍼 포츠(기네스 펠트로 분)와의 대화 가운데 등장한다.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로부터) 내가 살아남은 거야... 나는 마침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어. 그리고 내 마음으로부터 그게 옳은 일이라는 걸 알아." 그리고 10여년 전 이 대사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 실천된다.
마찬가지로 동료를 위해, 모두를 살리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 나타샤 로마노프(블랙 위도우) 역시 분명한 사망 플래그가 존재한다. 바로 <어벤져스 1>에서 호크아이(제레미 레너 분)와 나누는 대화 가운데 등장한다. "내 삶은 피로 물들어 있어. 그걸 씻어내고 싶어."
작중 나타샤의 원래 신분은 어려서부터 살인병기로 키워진 러시아의 특수요원이었다. 그러나 작전을 수행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이에 환멸을 느끼던 중 실드(S.H.I.E.L.D) 국장 닉 퓨리(새뮤얼 L. 잭슨 분)에 의해 포섭되어 지구를 수호하는 요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선의 편으로 전향했지만, 그녀는 많은 무고한 이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해 왔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자주 고통스러워한다.
<어벤져스 1>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듯, 그녀와 호크아이는 훈련받은 요원으로서 대단한 능력을 갖췄지만, 슈퍼히어로는 아니다. 슈퍼히어로들 가운데 그나마 약체에 속하는 캡틴 아메리카보다 약한 일반인의 몸으로 어벤져스 활동을 하다 보니, 매번 거의 빠짐없이 죽음의 위기에 노출된다.
하지만 나타샤는 늘 가장 위험한 곳에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이런 희생적 활약의 이면에는 그녀의 죄의식, 부당한 살인에 대한 부채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부채의식은 이번의 작품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호크아이를 대신해 죽음을 선택한 그녀의 행동에서 재차 확인된다.
서로가 자기가 죽을테니 살아서 인피니티 스톤을 전달하라고 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결국 그녀가 확고하게 자기를 희생하기로 선택한 장면에서, <어벤져스 1>에서 나온 나타샤의 사망 플래그는 실현된다.
MCU의 작품들이 여러 모로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유치하고, 또 너드들(nerds)의 하위문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도, 간혹 이런 요소들이 있어 어른들도 볼 만하고, 인간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과제들을 던져준다.
토니 스타크와 나타샤 로마노프의 죽음은 죄인의 회심과 자기희생이라는 기독교적 인간관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더 그러하다.
그러면 대체 MCU의 히어로 서사들 가운데는 왜 유독 이렇게 기독교적인 모티프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MCU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스탠 리(Stan Lee) 때문이다.
MCU의 캐릭터 상당수를 창안한 스탠 리는 95세를 살고 작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의미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바로 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물이 남긴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MCU 캐릭터들 가운데 다수를 창조한 캐릭터 및 스토리 작가 스탠 리. MCU 영화들 가운데서 까메오로 자주 등장한다. |
일전의 평론들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듯, 스탠 리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데다 기독교 문화의 지배력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했던 1900년대 초중반의 미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런 삶의 배경 때문에 그는 신구약 성서 전반의 여러 일화들을 잘 알고 있었고,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을 창안할 때 성경의 이야기들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분명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라온 덕에 인류를 구할 영웅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스탠 리의 스토리를 코믹스를 통해 읽어들이는 독자들 역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스탠 리의 캐릭터들 속에는 거의 빠짐없이 히어로의 희생,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모티프들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번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서사에는 구세주 그리스도 내러티브의 요소들(특히 히어로들의 대거 부활)과 함께 죄인들의 속죄(아이언맨과 블랙 위도우의 죽음)라는 모티프 역시 진지하게 반영되어 있다.
슈퍼히어로 장르와 TV 시리즈 <아메리칸 갓>(American gods)의 비교 평론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최근의 판타지-히어로-신화 장르 영화와 TV 시리즈들 가운데서는 점차 기독교적 서사요소들이 사라지고 그리스 신화의 다신교적 서사요소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성향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MCU 역시 그리스 신화적 요소가 다분히 반영되어 있지만, 그래도 항상 서사의 중심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의 인간상을 반영하는 히어로들의 영웅적 활약과 희생에 지정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MCU 페이즈 3은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함께, 스탠 리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다.
▲블랙 위도우와 호크아이(제레미 레너 분).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블랙 위도우는 실드 동료인 호크아이를 위해, 그리고 인류의 부활을 위해 생명을 잃는다. |
이어지는 페이즈 4로부터는 갈수록 기독교적 서사요소 대신 다신교적, 종교다원주의적 서사요소들이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페이즈 4부터 서사를 이끌어가는 전체 주인공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높은 캡틴 마블(브리 라슨 분)의 모습과 성격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중 캡틴 마블에게 정의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언맨이나 블랙 위도우에게서 볼 수 있는 자신의 힘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힘을 과거의 죄에 대한 빚갚음의 길로 여기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과거 여성으로서 차별받은 삶을 살았으니, 당연히 그 보상으로 뛰어난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페미니즘의 정의가 서사를 지배하고 있다.
결국 스탠 리가 사라진 MCU는 향후 점점 더 디즈니의 정책적 방향대로(마블 엔터테인먼트는 몇 년 전 디즈니에 인수되었다) 기독교적 구원사상이나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뇌 등은 배제하는 대신, 인간에 의해 펼쳐져야 할 당연한 정의사회 구현에 목말라하는 진보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반영하고, 그것도 신화적인 모습으로 반영하는 작품들을 쏟아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결국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기독교 구원론을 중심소재로 삼았던 슈퍼히어로 영화의 시대가 저물고, 정치적 올바름(PC)의 가치를 표방하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는 전환점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MCU의 기본 세계관이 즉각적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작품들에 반영되는 기독교적 문화관이나 인간관이 이전보다 약화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듯하다.
이 영화가 선사하는 감동은 결국 기독교적 인간관을 대표하는 두 영웅의 죽음에 의해 극대화된다. 그렇지만 이 두 영웅의 죽음은 대중문화 속에서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현실을 반영하는 단적인 예라고도 볼 수 있다.
▲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죄인의 속죄라는 기독교적 모티프를 충실히 반영한 두 등장인물, 나타샤 로마노프와 토니 스타크. |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슈퍼히어로 문화현상이 그저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화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들이 넘치는데다, 대체종교로서의 목적이 분명해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허구적 신화 수준으로 끌어내려 인식시키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 존재했다. 무엇보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세계의 종말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다분히 기독교적 역사관과 세계관을 다루어 왔다. 이로써 종말과 구원이라는 개념에 대중이 익숙해지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향후로는 이런 요소들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히어로 영화의 시대를 맞이할 듯하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평등의 사회정의를 위한 영웅들이 속속 주역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영화들을 보면 그 형태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애초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은 미미한 대신 진보적 민족주의가 강세인 한국의 대중문화계에서, 구원과 죄책에 대해 말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우리 민족이 외세에 부당한 고통을 당했으니 우리가 선이고 억압한 자들이 악이라는 자기정당화의 자세가 당연시되는 것이 한국영화 서사들에 담긴 주된 정서라 할 수 있다.
앞으로는 미국에서도 이런 성향이 강화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민족주의 성향이 여기에 관여했지만, 미국에서는 차별금지, 특히 남녀차별 및 동성애자 차별, 종교적 차별 금지에 강조점을 두는 식으로 히어로 영화들도 변화되는 모습을 보일 듯하다.
이런 의미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기독교적 서사는 반가운 측면도 있지만, 다가오는 시대 대중문화의 동향, 그것도 기독교 문화와 점점 더 멀어져가는 동향을 예상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아쉬움 역시 느껴지게 한다. <끝>
▲향후 MCU 페이즈 4의 서사전개 방향성은? 점진적으로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을 배제해 갈 공산이 커 보인다.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