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회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제가 사랑이 부족합니다. 사랑을 좀 알게 해 주십시오. 성도를 사랑해야 목회할 거 아닙니까?" 다음 해에 이 목사님 가정에는 다운증후군 아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키우면서 목사님은 '참 사랑이 무엇인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 목회를 잘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어느 아들이 교회에서 실시하는 <아버지학교>에 등록해서 배우다 보니,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그 숙제는 자기 아버지를 찾아가서 안아주며,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숙제를 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끄억 끄억 울더랍니다. 자기 아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줄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아들은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고 늘 부정적인 감정만 지녀왔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아버지는 아들이 어렸을 때 너무 자주 매를 들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신 예수님 생각이 난 것입니다. 하루는 아들을 때리다가 그 날도 예수님 생각이 나서, 속으로 회개를 하면서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를 맞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그 순간까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들끓던 이 아들이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울 수 있구나~.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다니~.' 이 사실 때문에 이 아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화해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 아닐까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누구나 욕하는 대상인 세리에게 화를 내시지 않았습니다. 간음하던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도 더럽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착한 척하고 거룩한 척하는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저주까지 하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자기 가슴을 치면서,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드린 그 세리의 기도를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드리는 바리새인의 유창한 기도에는 귀를 막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화된 이유는 경건하기 때문도 아니고, 십일조를 잘 드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저렇게 피를 흘려 고통을 받으시다니...'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성령님과 이러한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풀잎에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고 했습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면 안 되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송명희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 주님 상처에 내 상처 묻으며, 내 주님 아프신 가슴에 내 아픔을 달래리라."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