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성공'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공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고, 실패라 하기에는 그래도 얼마간의 진보가 있었던...그런 애매모호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절반의 성공이란 말은 사실, 실패를 뜻하는 말입니다. 결국, 목표한 것을 다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 중에 '졌잘싸'라는 말이 있습니다.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의 준말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강팀을 상대로 비록 졌지만,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졌다는 말이지만 '절반의 성공'이란 말과 조금 어감에 차이가 있는 것은, '절반의 성공'이란 말은 결과에 포커스를 둔 말이지만, '졌잘싸'라는 말은 과정을 좀 더 주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0:28 이하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북 이스라엘의 10대 왕 예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의 죄에 빠뜨렸던 아합의 집을 치고 왕이 된 예후는 사실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바알은 멸하였으나 금송아지 우상은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후의 삶이 절반은 성공한 것이었을까요?
다른 북 이스라엘의 왕들과 비교해 볼 때, 사실 예후는 평균 이상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계시의 말씀을 따라 아합의 집을 심판했을 뿐 아니라, 그가 섬기던 바알의 목상을 헐고 바알의 신당을 헐어 변소를 만들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그는 북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던 금송아지 신상은 헐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헐면 백성들이 자신을 버리고 남쪽 유다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후의 개혁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심판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죄는 남겨놓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놓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담임 목사에 관한 교회 내규를 하나 발의하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은퇴하게 될 저와 저 뒤에 오는 목사들에 관한 내규입니다. '담임 목사는 교회를 은퇴한 후 원로 목사를 포함한 그 어떤 교회내 직분을 가질 수 없으며, 은퇴 후 반경 50 마일 밖으로 이사한다...' 원래 안식년을 마치고 제 2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이 내규를 정하려고 했지만, 알아보니 상위법인 총회법이 원로 목사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글로 적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지 굳이 뭐 글로 적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나이 먹으면 마음이 어떻게 바뀔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절반의 성공'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믿음의 말일 수 없습니다. 죄가 남겨진 인생은 결코 성공한 인생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절반의 성공'은 없습니다. 혹 있다면, 오직 '졌잘싸', 졌지만 잘 싸운 우리의 삶을 예수께서 이기는 삶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함께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는 우리 모두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