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 인물의 일대기(역사)를 추적해보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견지해왔던 가치 혹은 그 사람 만의 독특한 특성은 그 사람의 일생 속 여러 사건 혹은 일화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표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기독교 역사에 대한 연구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기독교 역사를 면밀히 추적하다 보면,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난, 기독교가 지닌 일종의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그의 책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세계 기독교'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온 결과, 발견한 기독교의 두 가지 원리를 소개합니다. 토착화 원리와 순례자 원리가 바로 그것이죠.
이번 글에서는 그간 제가 연재해 온 본 시리즈의 글들이 견지해 왔던 이 두 원리들을 좀 더 명확하게 살펴보자 합니다. 즉 더 깊은 세계 기독교의 논의로 들어가기 전, 우리에게 필요한 개념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1. 토착화 원리(The Indigenizing Principle)
우리는 모두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앤드류 월스가 이야기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고후 5:17)은, 어떠한 문화의 영향력도 받지 않는 일종의 '진공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이제 진공 상태에서 그의 삶을 시작하거나 지속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속한 문화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선 그를 (특정한 문화와 역사에 속해 있는- 기고자 주) 그 자체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생각은 이전에 그러하였듯 그가 속한 문화와 역사에 영향을 받는다. ... (이처럼)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교회들은 문화 속에 속한 교회들이다(앤드류 월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바울의 선언은 '우리가 속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이전과는 다른 존재의 양식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를 등지고 외딴 곳에 들어가 살아가지 않고, 오히려 '그 문화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고 바로 '그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문화는 각각의 지역, 사회, 민족 등에 따라 다채롭고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대체로 서구인들이 속한 문화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철학적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로 대변되는 사고방식을 지닌 '개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문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비롯한 아시아인들의 문화는 서구인들이 속한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알기에 고로 나는 존재한다(I am known, therefore, I am)"로 대변되는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인' 문화일 수 있죠.
▲서양(왼쪽)과 동양(오른쪽)의 생활 양식 차이를 시각화한 중국인 작가 양 리우(Yang Liu)의 그림. ⓒartistsong |
하지만 놀랍게도 복음은 이와 같이 다양한 문화권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곤 그들의 문화적 상황에 완벽히 들어맞는 풍부한 자원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그 문화권에 뿌리를 내립니다.
우리가 지난 4편 '로마 국교'였던 기독교, 그 멸망에도 살아남은 이유에서 기독교 역사 속 세 시점들을 통해 살펴보았듯,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문화도 배제하지 않는 동시에 그 어떠한 문화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각 문화권에 다채롭게 뿌리를 내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후 124년 어간에 익명의 저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Epistle to Diognetus)』는 이러한 기독교가 지닌 일종의 원리(혹은 특징)를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국적, 언어, 관습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만의 도시를 만들어 따로 떨어져 살거나, 자기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별난 생활 방식에 따라 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헬라 마을이든 외국 마을이든 자기가 속한 마을에서 삽니다. 또한 옷 입는 것이나, 식사 및 다른 행동들에 있어서도 현지 일반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 그들은 자기 나라의 주민입니다. ... 그들은 시민으로서 역할을 다합니다. ... 그들에게는 어느 외국도 모국이요, 어느 모국도 외국입니다."
위 묘사가 보여주듯, 기독교는 복음이 전파된 그 지역에 '토착화'되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즉, 기독교는 복음이 전파된 그 지역에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실체 혹은 알맹이 없이 추상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자리매김하며 말 그대로 해당 문화와 역사적 시점 속에서 '맛을 내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성장해온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 지닌 하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토착화 원리'입니다. 곧, 우리가 속한 문화 속 아주 구체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하고 뿌리를 내리는 복음이 지닌 특성 혹은 능력 말입니다.
"토착화 원리란 우리가 속한 문화 속 아주 구체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하고 뿌리를 내리는 복음이 지닌 특성 혹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2. 순례자 원리(The Pilgrim Principle)
한편 기독교 역사 속 복음은 토착화 원리와는 상반되어 보이는 또 다른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세상에 속했으나 또한 속하지 않은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독교인들에게 부여하는 '순례자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었지만 언제나 현재의 터전이 자신들의 '영구한 터전'이 아님을 기억했습니다(히 13:14).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시민권을 '하늘'에 두고 있는 일종의 '순례자'와 같기 때문이었죠(빌 3:2).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은 현재 그들이 속한 바로 그 문화와 사회, 그리고 터전을 결코 '궁극적 형태'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속한 문화만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진정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그 어떤 문화권에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되려 기독교인들은 장차 임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며, 성경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 그 날의 모습을 기준으로 자신들이 속한 문화, 사회, 터전을 변혁시켜 나가는데 힘썼습니다. 서로가 속한 문화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복음의 영향력 하에서 때론 그 문화를 비판하거나, 정화시켜 가면서 말이죠.
"기독교가 문화와 만나게 되면 기독교적 관점을 통한 문화 비판이 일어난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의 유산이 되었다. 개별 문화를 절대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기독교의 입장은 과거 그리스-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라민 산네)."
그리고 시간과 장소,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이 지니고 있는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주적인 공통성을 지니게 됩니다.
비록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심지어는 다른 시대(과거 세대)를 살았고 또한 앞으로 살아갈지라도(미래 세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본향을 두고 있는 순례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믿음으로 연결된 하늘 가족이라는 공통된 인식과 정체성을 지니는 것이죠.
교회의 역사 속에 '교회의 보편성' 혹은 '공교회'라고 불리며, 전수되어온 바로 그러한 인식과 정체성 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온 양 무리의 목자도 한 분이시고, 그 몸의 머리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며, 구원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이며, 성경 또는 언약도 하나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오직 하나의 교회가 뒤따르며, 이것이 우리가 교회를 공교회적(katholiek)이라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보편적이며(algemeen),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있고, 모든 시간에 걸쳐 있으며, 어느 시간이나 장소에도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17장)."
이처럼 복음은 전 세계의 각기 다른 지역과 문화 속에 들어가 그곳에 뿌리를 내릴 때에도, 모든 신자를 순례의 여정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준으로, 자신들이 속한 문화의 요소들을 거부하거나 변혁시키도록 하는, 그리고 그들 자신이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초월하여 동일한 순례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바로 그 순례의 여정 말이죠.
결국 '순례자 원리'란 모든 문화적, 시대적, 인종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초월하는,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전 세대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연결하는 복음이 지닌 특성 혹은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례자 원리란 모든 문화적, 시대적, 인종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초월하는,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전 세대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연결하는 복음이 지닌 특성 혹은 능력을 말한다. ⓒTGC |
3. 두 원리의 조화, 그리고 세계 기독교
기독교의 역사에는 이 두 원리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수많은 예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원리 중 하나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비극을 양산한 사례들도 존재하죠.
때로는 순례자 원리를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한 집단의 문화, 인식체계, 사유를 곧 '궁극적이고 완전한 형태'로 인식하여 이를 '다른 이들도 마땅히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인 것'인양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토착화 원리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결과, 기독교는 성경이 확고히 제시하는 방향성을 상실한 채 종종 '상대주의'의 늪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조화롭게 그려내고 있듯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역사의 선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듯이, 이 두 원리를 함께 추구해 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두 원리를 한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함께 추구해 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다양한 조언들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본 시리즈의 제목인 '세계 기독교 내다보기'가 지니고 있는 메시지와 같이, 세계 기독교를 내다보는 작업, 곧 우리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인식하고, 그들을 알아가며, 그들을 통해 배우는 과정을 통해 이 두 원리를 좀 더 조화롭게 추구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국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목회자인 팀 켈러(Tim Keller)는 그의 저서 『센터 처치』에서 이와 관련된 예화 하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팀 켈러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고 있을 당시, 학생들과 함께 실제 목회 상황의 케이스들을 연구하는 세미나를 열었다고 합니다.
당시 세미나에서는 영미권 백인들은 물론 유학을 온 한국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팀 켈러는 세미나에 참여한 학생들 모두가 소위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들이 매우 다른 방식으로 목회에 접근하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의아하게 여긴 켈러는 이를 면밀히 살펴본 결과, 그들이 동일한 신학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목회에 대한 상이한 접근을 하고 있던 이유가, '권위에 대한 인식의 차이', 나아가 '권위'를 대하는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음을 발견합니다.
곧 한국 학생들은 그들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질서와 권위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경구절들(롬 13장, 히 13:17 등)에 집중한 반면, 영미권 학생들은 제도와 권위에 대해 깊이 의심하는 그들의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권위가 잘못 사용된 경우들에 대한 성경구절들(마 20:24-28, 벧전 5:14-, 행 4:19, 5:29 등)에 집중한 것이죠.
그런데 켈러는 (동일한 개혁주의 신학을 견지하고 있는 중에도) 이와 같이 목회에 대한 상이한 접근법을 지니고 있던 영미권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이 서로의 견해들(각자 집중해서 보고 있는 말씀 구절들과 그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놀라운 변화에 이르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즉 영미권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 서로가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이전에는 전혀 던지지 않았을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전에는 명료하게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의사소통자로서 우리가 문화적 맹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그간 보지 못하고 있던 '성경의 진리와 깨달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예화를 통해 팀 켈러는 다음과 같이 독자들에게 권면합니다.
"우리의 문화적 맹점들 때문에 우리는 다리 위에 있는 사람들(다른 문화권에 속한 이들- 기고자 주)에게 말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말을 들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말을 들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질문이나 우리가 말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들, 그리고 그들의 소망과 열망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팀 켈러는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을 다리 위에서 나누는 '대화'로 표현합니다. 그리곤 그들의 말을 때론 듣고, 질문하며, 그들의 관점으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관점을 점검해볼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기 다른 관점과 강조점을 지니고 있는 타문화권에 속한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맹점을 발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계 기독교라는 주제는 우리를 지속적으로 이러한 류의 '대화'로 인도합니다. '우리'라는 울타리 밖을 조금만 나가보면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타문화권 기독교인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리면서, 그리고 그들이 오늘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수많은 메시지들과 도전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말이죠.
나아가 이러한 류의 대화, 곧 우리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인식하고 그들을 알아가며, 그들을 통해 배우는 대화의 장으로 우리를 인도함으로써, 세계 기독교는 우리가 토착화 원리와 순례자 원리 모두에 충실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한편으로 세계 기독교는 그간 우리의 문화적 맹점들로 인해 보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를 더욱 잘 섬겨 나갈 수 있도록 합니다(토착화 원리).
또한 동시에 세계 기독교는 이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방향성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 모두가 저 하늘 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순례자들'이며, 이 여정 위에 함께하고 있는 수 많은 주의 백성들의 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순례자 원리).
서동준 강도사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였다. '세계기독교학'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으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post.naver.com/seodj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