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인 1936년 이뤄졌던 성결교 총회 분립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됐다.
1936년 제3회 성결교 총회에서는 1·2회 총회장 이명직 목사에 이어 변남성 목사가 무기명 비밀투표에 의해 총회장으로 선출됐는데, 교단의 모태인 동양선교회 이사회가 이를 무효화하고 총회 해산을 선언했다. 이에 이사회 결정에 불복한 목회자들이 교단을 떠나, 그해 11월 29일 새 교단인 '하느님의 교회'를 창립한 것.
정상운 박사(전 성결대 총장)는 최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1936년 성결교 총회 분립에 대한 재조명'이라는 제목의 예장 합동한양 총회 제3차 목회자 연장교육 세미나 강연을 통해 이에 대해 설명했다.
정 박사는 "1936년 성결교 총회 분규 사건은 단순한 성결교회만의 사건이 아니라, 당시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표출시킨 사건이었다"며 "그러나 역사적 실제와는 달리,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기득권을 가진 선교사들과 제휴해 발전해 온 제도권 교회 입장에서 일방적인 부정적 평가 또는 무비판적 수용으로 일관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시기 한국 기독교는 교회와 교파간, 신학의 진보와 보수간,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 서북지방과 중부지방 교인 사이 갈등과 분쟁으로 내적 시련을 겪고 있었고, 체제화·교권화되는 제도권 교회의 경직성도 문제가 됐다"며 "이러한 분규와 분파 현상 속에서 한국인의 주체적 신앙과 교회수립 운동이 꾸준히 전개됐으나, 이러한 운동들이 제도권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으면서 한국 기독교 전체의 갱신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함에 따라 다양한 '종파' 분립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상운 박사는 "일제 하 한국교회 교권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됐는데, 3·1운동 이후 한국인의 주도권 행사에 대한 관심이 민족자존적 기풍의 진작과 함께 높아졌다"며 "일부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인종차별주의와 문화우월주의적 사고, 그것에서 비롯된 비행과 추문 사건으로 인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 사이엔 긴장 관계가 조성됐다"고 전했다.
정 박사는 "여기에 1세대 선교사들이 지닌 한국교회에 대한 주인의식과 지배의욕, 2세대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몰이해 등 부정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위기 상황까지 연출되기도 했다"며 "이같은 1920-30년대 선교사와 한국교회 사이의 갈등은 한국교회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내적으로는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혁신운동이었고 외적으로는 선교 초기부터 절대적 권위를 행사해 온 선교사들의 전횡에 반대한 반교권 운동이었다"고 했다.
그는 "성결교회의 경우도 1930년대에 들면서 교회 수가 점점 증가하고 한국인 교역자가 늘어나면서 한국인 교역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요구되자, 종래 동양선교회라는 선교사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탈피하려는 민족 주체적 의식이 한국인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모아져 1932년 '자치선언'이 선포되고, 그 기세가 교단 저변에 확산되기 시작했다"며 "그 기세는 1933년 확산·발전돼 이사회에 예속되고 한국인 독자적 행정능력이 없는 연회를 해체하고, 제1회 총회를 개최해 무기명투표를 거쳐 이명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곽재근 목사를 부회장으로 선출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정상운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총회 제공 |
정상운 박사는 "자치선언을 통한 자립선교는 성결교회에 자립적 선교의욕을 고취시켰고, 특히 만주선교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 만주교회들로 하여금 자립적·자기의존적·적극적 교회 설립과 성장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며 "해방 이전 한국 성결교회가 장로교·감리교와 더불어 3대 교단 중 하나로 부상하는 위치에 올려놓는 기반이 됐다"고 평가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1934년 제2차 총회에서 이명직 목사가 다시 총회장으로 선출돼 정치적 자치운동이 계속됐지만, 동양선교회는 제1회 총회가 결의한 이사 선출권을 총회에 이양하는 정치적 자치를 반대했다. 동양선교회 총본부는 총회 기간 중인 4월 24일 킬보른 총리의 권사(勸辭)를 통해 미국의 불경기를 이유로 한국 교역자들의 봉급을 끊겠다고 언급하면서 자치운동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이후 동양선교회 총본부는 한국성결교회의 요청을 거부한 채 이사회를 장악했고, 1935년 총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치·자립운동은 계속돼, 1935년 8월 22일 6개 지방 순회 목회자들과 한국인 이사들이 다시 모여 재차 자치선언을 했다. 그러나 한 달 뒤인 9월 교단 잡지 '활천' 편집자였던 이명직 목사가 경질되고 허인수(P. E. Haines) 선교사가 임명됐다. 이후 활천에서는 자치·자립운동 관련 글이 실리지 못했고, 이를 비판하는 허인수 선교사의 글이 매호 들어갔다.
정상운 박사는 "선교사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나 한국 교인들의 자치운동 열망은 표면화되지 못하고 내적 갈등으로 심화돼 갔다. 선교사들은 여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이사회를 통해 절대적 교권을 발휘하고 있었다"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3회 총회가 열렸는데, 개혁과 자치를 요구하는 신진 계층의 지지를 받은 소장파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1·2회 총회와 달리 이사회는 여기에 대한 불만이 대단했고, 총회 자체를 불신임했을 뿐 아니라, 변 목사를 면직 처분해 버린 후 총회 체제를 선교사 중심인 이사장 체제로 만들었다"고 했다.
정 박사는 "당시 성결교 한국 지도자로서 최고 위치에 있던 직전 총회장 이명직 목사는 지금까지 보인 태도와 달리 제3회 총회의 적법한 선거결과에 승복하거나 대다수 한국 교역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이사회 편으로 돌아서 선교사들의 재신임을 얻었다. 그러면서 그가 동양선교회 이사로 복귀할 9월쯤 '활천' 편집인(주간)직도 다시 맡게 됐다"며 "이사회의 일방적인 제3회 총회 무효선언은 개혁과 자치를 주장하던 목회자들의 반발을 사게 됐고, 변남성·안형주·서재철·김광원 등 의식 있는 신진 개혁세력들이 성결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했다.
교단을 떠난 이들과 1935년 12월 27일 이미 동양선교회 이사회에 의해 면직된 정남수 목사는 총독부 당국에 '하느님의 교회' 포교원을 제출하고 이듬해 5월 당국의 공인을 받는다. 이후 탈퇴 목사들을 중심으로 1936년 11월 25-29일 평양 상수리교회에 모여 '하느님의 교회 제1회 공의회'를 조직했다. 창립 당시 참가 교역자들은 14명, 교회는 15곳, 평신도까지 포함해 30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의 교회는 정치적 통제기관의 하향식 조직체제를 거부하고 민주적 대의제인 공의회 제도를 받아들였다"며 "또 신앙개조에 매이기보다 단순히 성서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모습을 보이는 등, 교리와 제도에 매인 제도권 교회의 거부, 구체적으로 동양선교회 이사회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조직된 교단임이 창립선언에 잘 반영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교단은 1960년 제8회 공의회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됐고, 다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한양)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강연이 진행되고 있다. ⓒ총회 제공 |
정상운 박사는 결론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했다. 먼저 '지금까지의 1936년 총회 분립 원인에 대한 평가'에 대해 "성결교회 내 저작물로는 급속한 자급운동으로 인한 교역자 생활비 지급에 대한 지방교회의 불만, 이사회 운영에 대한 한국인 이사들 간 의견 불일치, 중앙과 지방 목회자들의 임지 결정에 대한 대립과 불만, 서울출신 이사들과 서선(西鮮) 출신 이사인 곽재근 목사와의 지방색 갈등, 노년층 연장자 중심 세대와 젊은 혁신 세대와의 갈등 등 여러가지를 들고 있다"며 "그러나 이는 부차적·표면적 원인이었고, 그 근원에는 한국 성결교회의 정치적 자치권에 대한 동양선교회 총본부 이사회와 한국 목회자들 간의 이해관계와 갈등에서부터 비롯됐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음으로 '1936년 총회 분립사건은 한국교회의 자치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일방적·독선적 파행'이라고 했다. 그는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와서 한국교회가 끼친 공헌이 크나, 상대적으로 해악도 없지 않았다. 초기 한국교회사를 보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 사이에 상당한 깊이의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어져 있음을 여러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며 "한국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자신들의 공로 인식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향유하려는 자세에 변함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셋째로는 '당시 한국 교역자들의 분명한 의식 부족'을 꼽았다. 그는 "당시 이명직 목사가 처음 자치선언 입장에 서서 한국교회와 동양선교회 사이의 입장을 조정하면서 주체적으로 끝까지 이끌어 갔다면, '하느님의 교회'는 설립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목회자들의 경제적 자립과 자치를 꾀하려던 노력의 재평가'다. 그는 "자치운동 실패와 선교사들의 파행적 주도권 강점(强點)은 정치적 통제 기관을 배제하고 성서 외의 법규를 세우지 않은 '하느님의 교회' 태동을 낳았는데, 이는 당시 신진 개혁세력이 성결교회를 내부적으로 음해하고 파당을 일으켰다는 '반선교사 불순분자 세력'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지양하게 해 준다"며 "당시의 노력은 오늘의 시점으로 민족 주체적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긍정적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강을 정리하면서 정상운 박사는 "종교개혁 500주년과 성결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아, 한국 성결교회는 1936년 제3회 총회 때 동양선교회 이사회의 불법적이고도 일방적인 횡포에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았던 변남성·곽재근 목사 등의 동역자들에게 행했던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역사적 참회와 반성이 어떤 형태로든 뒤따라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