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Photo : ) ▲이경섭 목사.

 

 

근자에 들어 한국교회 안에서 '값싼 구원(은혜)'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신칭의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원래 이 용어의 출처는, 전쟁 광분자 히틀러룰 암살하려는 단체에 속했다가 발각돼 교수형을 당한 독일 루터교회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 Dietrich, 1906-1945) 목사가, 무기력한 조국 교회에 대한 좌절감에서 했던 질타였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를 오늘날 전혀 정황이 다른 한국교회에 적용하여 남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당시 독일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침략 국가였지만, 한국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온 약소국이었기에, 그 용어를 대등하게 적용하는 자체가 불가합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평안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본회퍼 목사를 비롯해 이 용어 사용자들이 어떤 용도로 쓰던, 은혜에 '값싼(valueless)'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자체가 언어모순이라는 점도 지적하고자 합니다. '값싼'이라는 용어는 싼 값으로 무엇을 구입한다는 뜻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에는 붙일 수 없는 수식어입니다. 은혜란 본디 '값을 치룰 수 없을 정도로(priceless)'  귀한 것을 아무 대가 없이 받는다는 뜻입니다.

만일 은혜에 대가를 지불하는 순간, 은혜는 더 이상 은혜 되지 못하고 싸구려로 전락됩니다(롬 11:6, 갈 2:21). 꼭 은혜에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면, 성경의 표현대로  '거저 주시는 바(엡 1:6)'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신칭의를 싸구려 구원이라 비난하는 공격자들은, 이유를 그 교리가 교회를 세속화하고 가라지들을 양산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막연한 추정일 뿐,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세상 물건들이야 덤핑이나 공짜로 준다면 '웬 떡이냐'고 몰려들지만, 신앙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값없이 은혜로 되는 구원을 외치면 '웬 떡이냐'고 환호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배척당합니다. 보편적 종교 관념만을 가진 세상 사람들에게는, 율법적 개념이 들어간 종교라야 뭔가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 '은혜의 복음'을 전했을 때, 소수의 기층민들 외에 누가 환영했습니까? 그나마도 예수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른 채, 떡 만들어 주는 이적에 매료된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요 6:26).

바울이 이신칭의를 말했을 때 환영받았습니까?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는 나사렛 이단 괴수라고 핍박받았으며(행 24:5), 교회 안의 성도들부터는-헌신적인 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곧잘 율법주의로 회귀해버리는, '마이동풍'식 반응만 볼 뿐이었습니다(갈 4:8-11, 5:1-12).

중세 때 루터(Martin Luther)가 이신칭의를 말했을 때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고, 로마교회로부터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파문당했습니다. 오늘도 한때 복음에 반응을 보였던 많은 이들이, 은혜를 방종거리로 만들어버리는(유 1:4), 가라지 속성을 보여줍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은혜의 복음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 들뿐입니다(행 13:48).

이렇게 이신칭의가 교회 밖으로부터는 핍박을, 교회 안으로부터는 싸구려 구원이라는 모함을 받으면서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제껏 수호돼 왔음은, 그것만이 구원을 주는 유일한 능력으로 그들에게 인식됐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사도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의 말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에게 구명줄을 던져주었더니 그것으로 목을 맸다고, 익사 직전의 사람에게 구명줄을 안 던져 줄 수 있겠는가. 은혜를 남용하는 자들은 그대로 둬라. 그들 때문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이는 더 큰 손실이다."

실제로 교회사에서 은혜로 구원받고 그 은혜의 능력을 간증한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무가치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칭송한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은혜가 너무 커서 '남용이 따르는 은혜'라고 노래한 스펄전, '죄인에게 내리신 놀라운 은혜'를 칭송한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사랑'에 매료된 청교도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 등은 모두 위대한 은혜의 간증자들입니다.

이러한 숱한 간증자들은 묵과된 채, 은혜의 남용자들만을 부각시켜 복음의 확산에 제동을 거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격언의 구현을 넘어,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심대한 죄악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최근 들어 한국에서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면 '구원파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심히 우려할 만합니다. 만일 은혜를 남용한 구원파 때문에 은혜의 구원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면, 예정론을 숙명론으로 왜곡시킨 이슬람 때문에 예정론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다신론(polytheism)자들로 오해받을까봐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지 말아야 하며, 단일신론(Monarchianism)자들로 오해받을까봐 유일신 하나님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은혜의 복음은 구원파의 가르침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은 한번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에,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라도, 루터(Martin Luther)의 말대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기에, 여전히 회개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또는 성화가 칭의의 결과라는 우리의 주장을 두고 '성화 없이 칭의 없다'고 한 칼빈(John Calvin)의 말을 들고 나와, 개혁주의는 칭의받은 자에게는 성화가 불필요한 것으로 주장하므로 칼빈의 말을 부정한다고 억측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결코 성화를 부정하지 않으며, 순서상 성화를 칭의 다음에 둘 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성화가 수반되며, 성도를 칭의받은 자 답게 만드는 필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칼빈이 '성화 없이 칭의 없다'고 한 것은, 성화는 칭의와 불가분리라서 칭의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성화가 수반된다는 의미이지, '성화를 칭의의 열매'라고 한 루터나 개혁주의자들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칭의와 순종의 관계에서(약 2:21) 순종이 칭의의 결과로 파악되듯 '성화없이 칭의 없다'는 말 역시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수반한다' 는 뜻으로 파악됩니다.

이어 성화를 칭의의 '결과'로 규정하면 성화에 소극적이 된다는 실효성 문제를 들어, 긴박감 있게 성화에 매진하려면 성화를 칭의의 '조건'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이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자 합니다. 먼저 칭의 처럼 성화도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기에-곧 성도를 칭의받은 자답게 만드시는 사후(事後)의 담금질(quenching)이기에-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성화의 진작에 힘쓰는 측면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칭의의 사후적(事後的) 담금질인 성화는, 소위 칭의의 조건을 만족시키려는 인간 주도의 성화 노력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담금질이 너무 혹독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의심될 정도 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 다윗, 야곱, 바울 등은 다 그런 혹독한  담금질(quenching)을 통과한 이들이며, 오늘날 성도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칭의받은 성도를 거룩하게 만드는 이 성화의 담금질은, 말 그대로 풀무불(벧전 4:12)을 연상시키며, '값싼 구원' 운운하는 것을 입에 올릴 수 없게 합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 사후적(事後的) 담금질은 모든 성도에게 일반이며, 이것을 통해 칭의받은 자 답게 만들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은혜의 강조가 갖다 주는 구원파적 부작용은 즐겨 거론하면서도, 율법주의 신앙이 갖다 주는 파괴적 결과를 도외시하는 이들에게 따져 묻고 싶습니다(여기선 갈라디아서 2장 21절 같은 신학적 문제는 차치하고, 상담학적 차원에서만 접근하고자 합니다). 먼저 우울증을 가졌거나 쉽게 패배주의에 빠지는 의지박약자들에게는 율법주의 신앙이 불에 휘발유를 붓는 것처럼 그들의 증상을 급격히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교회사적으로, 엄격한 청교도들 중에 자신의 성화적 노력으로 칭의에 이를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정신병에 걸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정신과를 찾는 환자들 중 다수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도 이런 주장을 설득력 있게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그런 사례들을 목도합니다. 매사에 의기소침하고 죄의식과 절망에 쉽게 빠져드는 심신미약자들은,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구원, 위로, 평안 같은 은혜의 말씀들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클로즈업(close-up)되는 내용들은, 주로 스스로를 자책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는 율법주의적 가르침들 입니다. 예컨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겔 18:20)', '형제에 대하여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39-45)' 등의 말씀들만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자신은 이 말씀들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하나님 아들의 반열에 들 수 없으며, 반드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실제로 성경을 그렇게 읽었던 심신미약의 한 집사의 경우를 알고 있는데, 결국 그는 몇 년 후 불행하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정확히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가 생존시 산상수훈을 내게 보이면서 그런 절망감을 심각하게 토로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 유추가 가능합니다.

이처럼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쉽게 죄의식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이들에게 '구원받은 자도 지옥에 갈 수 있고', '자기의 성화적 노력에 따라 구원과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절망을 극대화시키는 잔인한 일입니다. 또한 이는 인간의 실상을 아시는 하나님이, 무능하고 절망적인 죄인들을 위해 그의 독생자와 성령을 보내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구원론, 인간론을 위시해 제반 영역들을 접근함에 있어, '하나님 중심'의 신학적인 접근과 더불어, '인간 중심(Human-centered)'의 상담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상담학적 접근은 배제돼야 하지만, 인간의 실상이 도외시된, 오직 신학만의 접근법 역시 인본주의만큼 위험합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박사가 '인간 중심의 교육 커리큘럼(개혁주의 교육학, 50쪽)'을 말한 것 역시,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시는 하나님 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 이해가 결핍된 채, 오직 신학에만 매몰되어 인간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신학은, 하나님을 단순히 종교 교주나 전제 군주로 전락시키고, 인간의 분수를 넘는 신인협동 구원론, 유보적 칭의론같은 교리들을 만들어냅니다. 반면 전적 무능한 인간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겸손자들은,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이신칭의'를 당연시 하고, 무한한 감읍함으로 받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