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노회장 선거에 출마하면 경안노회 380명 노회원들이 발칵 넘어지겠지? 하하"
그녀가 옆에 있던 부목사에게, 농담처럼, 별 기대 없이 말을 건넸다.
"...... 뒤집어질 것도, 안 될 것도 없지요."
의외였다.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자기처럼 그저 웃고 넘길 줄 알았는데, 사뭇 진지한 대답에 놀랐다. 덩달아 그녀의 웃음기도 사라졌다.
이렇게 장난치듯 시작된 대화는, 마침내 현실이 됐다. 경상북도 안동 위동교회를 담임하는 이상출 목사(69). 그녀는 지난해 가을 예장 통합(총회장 이성희 목사) 경안노회에서 교단 최초로 여성 노회장이 됐다.
여권이 많이 신장된 21세기, 이미 여자 대통령도 나온 마당에 이게 무슨 놀랄 일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통합 측이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락한 건 불과 23년 전인 1994년. 형제 교단이라 할 수 있는 예장 합동 측은 지금도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정도로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보수적이다.
게다가 경북 안동은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양반' 지역이다. 유교의 영향이 강한 이곳에서 '남자'라는 성별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이 남아있을 정도니까. 이런 안동에서 이상출 목사는 단 한 번의 선거에서 경쟁자 2명을 누르고 부노회장에 당선됐고, 이듬해 당당히 노회장이 된 것이다.
풀과 꽃이 가르쳐준 '농부의 지혜'
대체 그녀의 어떤 점이 '성별의 장벽'을 넘게 했을까? 태양이 작열하던 8월의 어느 날, 안동시 임동면의 위동교회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정겨웠고, 어디를 둘러봐도 논밭의 녹색으로 가득한 풍경은, 아련하게 향수를 자극했다. 이 목사는 그런 곳에서 34년을 목회해 왔다.
예배당은 크지 않았지만 그런 대로 반듯하고 품위가 있었다. 처음 만난 이 목사는 위동교회의 첫 인상이 그랬던 것처럼 편안하고 푸근했다. 얼음을 띄운 냉커피를 정갈하게 내오는 집사님. 곧이어 수줍은 미소의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내려놓고는 부끄러운 뒷모습을 보이며 달아난다. 오랜만에 느껴본 정(情)이 이곳에 가득했다.
1983년, 이 목사는 위동교회로 부임했다. 정식 담임목사는 아니었다. 그저 후임자를 찾을 때까지, 임시로 설교만 해주면 됐다. 어차피 교인들의 기대가 없으니 대충 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목사에게 '임시'는 곧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이었다.
"어차피 잠시 있다가 가버릴 곳이라는 생각 따윈 애초부터 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 나를 두셨으니 전력을 다하리라는 다짐뿐이었죠. 그래서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금 하는 설교가 끝인 것처럼 최선을 다했어요. 그렇게 작은 일도 정성을 다해 하다 보니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이 갔고, 어느새 지금 이 자리에 있네요.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 게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사명감이 그녀로 하여금 이토록 오랜 세월을 '시골 교회' 목회자로 살게 했는지 모른다. 사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데다 저출산·고령화, 게다가 직장을 찾아 도시로 떠나는 청년들까지..., 시골 교회의 목회 환경은 열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다.
하지만 이 목사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그녀는 풀의 싱그러움과 꽃의 향기로움, 사람들의 정다움에 먼저 눈길을 줬다. 고약한 거름의 냄새도, 흙길에 날리는 먼지도 그녀는 싫지 않았다.
"다 하나님의 뜰 안에 있는 것들이잖아요.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다 생각했죠. 그래서 밭에는 거름을 뿌렸고 꽃에는 물을 주었어요. 그렇게 가꾸다 보니 작은 풀 한 포기가, 꽃 한 송이가 목회의 지혜를 가르쳐주더군요. 뿌리가 건강한 장미꽃은 따로 약을 치지 않아도 진딧물이 끼지 않습니다. 이걸 보면서 깨달았죠. '아, 우리 신앙도 믿음의 뿌리가 튼튼해야 넘어지지 않는구나.' 잡초를 솎으면서는 '이렇게 죄도 뽑아야지' 하고 생각하고. 하하."
이것이 바로 시골이 그녀에게 준 선물, 바로 '농부의 지혜'다. 때맞춰 물을 주고 가지를 치듯, 신앙에도 다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힘보다는 경험과 정성, 무엇보다 하늘의 섭리를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는 걸 그는 위동교회에서 조금씩 터득해 갔다.
시골 교회가 이룬 청소년 1천 명의 '기적'
그리고 그녀의 이런 지혜는 청소년 사역에서 비로소 빛을 발했다. 출발은 이 목사가 위동교회 부임 후 처음 맞은 여름성경학교였다. 그녀는 인근 초등학교를 돌며 아이들을 교회로 불러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아이들로 넘쳤다. 이듬해엔 몰려드는 아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교회 앞 골목에 자리를 깔았다. 그렇게 몇 해를 이어갔다. '골목 학교'라는 별명은 이렇게 붙었다.
여름성경학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아이들은 어느새 중학생이 됐다. 중학교는 대부분 위동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를 두고만 볼 이 목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직접 아이들이 있는 학교까지 오가며 성경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이 목사가 바리바리 싸오는 김밥과 떡볶이로 배를 채워가며 하나님을 알아갔다. 또 다시 아이들의 수가 불었다. 학교 앞에 얻었던 작은 방이 금세 아이들로 북적했다.
마침 시내에 있던 안동교회가 교육관을 내줬다. 이 때부터 이 목사는 본격적으로 청소년 사역에 몰입했다. 안동 시내 중·고등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부흥이었다. 한때 1천명이 모였다. 이 목사는 청소년 사역 공로를 인정받아 교단에서 주는 상도 받았다.
이렇게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한 이상출 목사. 지금은 그 사역이 자연스레 장년으로 이어졌다. 이 목사는 몇 해 전 위동교회 예배당 바로 옆에 건물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장수 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올해까지만 목회하면 은퇴하게 되는 그녀는 여전히 복음에만 매달리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여성' 목회자? 여성 '목회자'!
이상출 목사와의 짧지만 인상 깊었던 인터뷰가 끝났다. 그리고 처음 가졌던 궁금증이 모두 풀렸다. 그녀가 성별의 장벽을 넘어 교단 최초로 여성 노회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가진 정체성, 즉 남자냐 여자냐 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부름받은 '목회자'라는 것, 그 하나만 단단히 붙들고 달려온 그녀의 삶 때문이었다. 결국 노회원들이 노회장으로 뽑은 이는 '여성'이 아니라 그저 한 명의 '목회자'였던 셈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