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들의 '문화의 장' 중 하나인 한국 CCM은 성령운동과 전도운동의 영향으로 더 정형화된 찬양의 필요성을 느끼던 1970년대 중반 경 시작됐다. 미국 CCM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한국은 80~90년대에 걸쳐 주찬양, 최덕신, 손영진, 다윗과 요나단, 이정림, 박종호, 송정미, 옹기장이, 소리엘 등의 등장으로 'CCM 전성기'를 맞았다. 이에 본지는 당시 화려했던 역사의 주인공들을 만나, 근황을 듣고 미래를 전망하는 기획 인터뷰를 마련했다. 지난달 30일, '춤추는 테너', '한국의 파바로티'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박종호 장로를 여의도침례교회의 카페에서 만났다.
박종호 장로는 1987년, 최덕신이 작사·작곡한 '내가 영으로'라는 노래로 제1회 극동방송 복음성가경연대회 대상을 받으며 본격 데뷔해 '하나님의 은혜', '시편23편' 등으로 국내 최고 가스펠스타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박종호는 아직 힙합과 레게 등의 요소가 낯설었던 당시, 대중음악과 가스펠을 접목시켜 교계뿐 아니라 세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1999년, '굿바이 박종호 고별 콘서트' 이후 예수전도단(YM)으로 활동했으며, 지난 2014년 첫 가요앨범 'About Love'를 발매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아버지 위해 자신의 간을 자른 딸
"나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다니..."
-지난해 간암으로 간 이식수술을 하시게 됐는데요.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몇 억의 빚에다가 수술비와 생활비도 걱정이었고, 간이식은 또 누구에게 받을 것이며...,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한꺼번에 와서 희망이 없었습니다. 당시 제 상황은 '돌무덤', 그러니까 죽음에 갇혔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억울해요, 살려주세요' 이런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전 제 잘못을 알았거든요. 평소 고기를 먹으면 2kg씩, 밥은 세 그릇씩 먹고, 커피엔 밥 숟가락으로 설탕 5번 넣고, 그러면서도 당뇨는 없다고 자신만만했죠. 운동도 안했었고, 건강검진도 안하면서 그렇게 까불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체념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병문안을 왔어요. 그 친구가 '종호야. 네가 예전에 나한테 수영을 가르쳐줄 때 몸에 힘을 빼야 물에 뜬다고 했었잖아'라고 했는데, 그 순간 번뜩했어요.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거 하나라는 걸 깨달았던 거죠. 제 현실은 빛도 희망도 하나도 없는 돌무덤, 죽음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냥 자빠져 있을 수밖에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저를 꺼내셨죠."
-수술을 받고 신앙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지난해 5월 24일 원래 있던 간을 잘라 없앴습니다. 그러니까 전 죽은 거예요. 그런데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고 저를 살게 하셨죠. 딸이 12시간 동안 수술을 하면서 1kg이나 되는 간을 잘랐고, 전 16시간 동안 그 딸의 간을 이식받는 수술을 했습니다. 간 기증자의 고통이 어마어마하고, 수술하다가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딸이 28살인데 '무서워서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더랍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간을 주려다 무서워서 도망가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부모가 자녀를 위해 간을 자르는데도 무서워서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기적적으로 진통제를 안 맞았는데, 딸은 퇴원할 때까지 진통주사를 달고 사는데도 고통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제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막내가 저 때문에 죽음을 각오했다니, 정말 서럽게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골고다에서 피눈물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뼈에 못이 박힐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가 느껴졌습니다. 많이 울었지만 또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제게 찾아와 악기를 보여주시며 '아끼는 악기는 고쳐서 쓰지,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고치고 나면 더 애착이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그렇게 보시고 저를 바꾸시는 것임을 알고 큰 위로를 받았고 제가 찬양해야 할 의미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세계 곳곳에서 많은 성도가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기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나니, 남에게 기도하겠다는 말을 가볍게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기도하겠다고 하면 즉시 그 자리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처음 만난 그 때의 마음 잊지 않으려..."
"죽음 경험하고 나니, 영생이 가장 시급한 문제"
-간이식 수술 후에 신경써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은데요. 요즘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하루에 두세 시간, 8~10km 정도 걷습니다. 걷고 걷는 게 일이예요. 수술 전에 제가 암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문이 다 퍼졌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절 살려주시니까 궁금해서 여기저기서 저를 찾으시는 것 같아요. 제가 56세라 공연할 나이는 아니지만, 하라면 또 하면 되는 거니, 교회에 찬양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2월 감사예배 '초심(初心)'을 드리셨는데, 장로님이 생각하시는 초심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얼떨떨했어요. 하나님께서 '진짜' 살아계시고, 사람이 이 땅에서 살다가 끝나는 게 아님을 깨닫고 그때부터 영원한 삶에 저를 걸게 됐죠.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팔짝팔짝 기뻐 뛰던 제 모습, 하나님을 향한 열정, 그리고 감사와 결단을 했던 그 마음이 초심인 것 같습니다. 가장 소중한 마음입니다.
제가 기독교 가수 중 공연 때 유일하게 레이저도 사용하는 사람인데요.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할 때는 교회 뿐 아니라 세상에 나가 기독교 문화의 새로운 시도와 획기적인 바람들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공연 한 번 하려면 몇 억씩 들지만, '태양의 서커스'처럼 전 세계 최고, 최선의 것을 만들려고 했었죠. 지금의 쇼 프로랑 상대가 안됐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이런 가사를 부를 때면 무대에서 불기둥이 솟게 했어요. 라스베가스, 브로드웨이 쇼를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하다보면 초심을 잃습니다. 이번에 간암에 걸려 한 번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경험하고 나니, '영생을 얻느냐 못 얻느냐' 이것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다음에야 문화, 콘서트, 책이 있고 밥이 있는 거죠. 예전에는 기독교 문화를 멋있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컸어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사랑의 그 마음, 은혜인 것 같아요. 이제는 레이저가 없고, 심지어 반주가 없어도 좋습니다.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 중간에 노래하는 사람이 아닌데, 지금은 인터뷰를 하다가도 노래를 합니다. '내가 너로 편케 하면~' 이렇게 노래 부르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웃음)."
-대학교 시절 서울대에서도 유망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한 사람이예요. 저는 대학 시절, 교회만 다녔지 술도 마시는 등 거듭난 모습이 없었습니다. 교회만 오면 '다 버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교회만 다니고 거듭남이 없는 사람이 교회 안에 많을 거예요. 저처럼요(웃음). 그랬던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소 가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또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실기는 항상 1등이었습니다. 선화예고에서 공부했고, 74년도 KBS '누가누가 잘하나'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요즘 서울대학교 후배들 보면, 음악적 배경에서 자라 예고부터 해서 대학을 가고 유학도 갑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면 시간 강사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게 현실이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은혜이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는 실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되려면 10년을 공부하듯이 음악, 찬양을 하는 것도 그런 진지함을 갖고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연예인들은 몇 백만 원을 주며 부르면서도..."
-당시 대중음악의 길을 가지 않고 CCM 사역을 선택하셔서, 많은 주목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조수미가 부럽지 않냐'고 물으신 적이 있는데, 복음성가 가수들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서 제 자신이 최고 비싸고 값어치가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 패배주의가 있더라고요. 복음성가를 저급한 문화로 보거나, 교회를 실패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정말 화가 났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 유명한 지도층, 부자들, 유명인들을 교회가 추켜세우는 것을 전 절대 반대합니다. 교회는 은혜 안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왕성하게 사역할 때 유명해져야 되는데 왜 지금 유학을 가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10년 동안 찬양을 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다시 하나님을 노래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세상에 없어질 것, 순간적인 유명함을 배설물로 여기고, 영원하신 하나님만 노래하고 싶어서 복음성가 가수가 된 것이예요. 사역보다 하나님 앞에 '프로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찬양 사역자들이 어렵게 사역하고 있는데, 예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전에는 교계가 절 어려워했습니다. 비싼 사례비를 요구한 적도, 받은 적도 없는데 박종호에게는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을 줘야한다는 소문이 있었죠. 물론 연예인이야 그렇게 주겠죠. 제가 처음 사례비로 15만원을 받았는데, 교회가 돈을 준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복음성가 가수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 세상에서 유명한 가수나 연예인들은 몇 백만 원을 주며 부르면서도 정작 복음성가 가수들은 시답잖게 취급을 하는 거예요. 복음성가 가수들이 이런 면에서 어려움이 많아요.
박종호보다 조수미가 온다고 할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겠죠. 효용가치가 다른 것 때문이라면 이해가 가요. 그런 걸로 상처를 받진 않는데, 유명한 분이 우리 교회 '와 주신다'는 인식, 이런 게 마음이 아파요. 중요한 것은 찬양사역자들이 너무 소중하고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사람의 지위나 세상 기준, 부에 상관없이 주어진 시간동안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직하고 충실하게 무시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체력이 되는 데까지 함께 사역하고 싶습니다. 그곳이 1천 명이 모인 곳이든 100명, 10명이 모인 곳이든 말이죠."
"난 포기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날 포기하지 않더라"
-앞으로의 사역이나 음반 발매 계획은 무엇인가요? 또 특별히 기도하시는 것이 있나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삶을 연장시켜주신 것처럼, 2017년은 제게 '덤'같은 해랄까요. 제대로 살고 싶습니다. 여러 사람이 기도해 주셔서 제가 살았으니 도리를 다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찬양도 하고. 시편에 가난하고 고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요즘 이 말씀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많이 갑니다. 제가 찾아가지 못했던 사람들..., 환자, 노숙자 그런 분들에게 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 가난한 선교사들이 참 많은데, 그들을 돌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새 생각하는 것이 북한과 중국입니다. 부흥한국 고형원 선교사가 북한을 위해 계속 기도하는데 요즘 집회를 가면 너무 회개가 됩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그들을 위해서 나는 무얼 했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에게 노래를 불러드리고 삶을 얘기하고 싶지만, 함께 아파하지도 못한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곳은 많이 먹어서 죽는데 그곳은 못 먹고 병들어 죽는 사람이 수십만입니다. 또 중국은 비공식적으로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고,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인구도 제일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과 관련된 앨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혜 말고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린 포기하더라. 우린 포기할 수 있었고, 난 포기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은 날 포기하지 않더라.'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이후 박종호의 30년 인생 스토리입니다. 제가 저를 포기해도 하나님은 매순간 절 붙들고 계십니다. 가장 큰 은혜의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