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침'은 성령세례, 소유, 권리, 확신, 보장 등 다양한 의미와 연관되며, 그때 그때의 의미 결정은 당시 성경 문맥 속에서 결정됩니다. 여기선 에베소서 1장 13절을 중심으로 '구원의 보증(고후 1:22, 계 7:3)', '복음 청취(고후 1:22)'와 연결지어 생각하려 합니다.
'구원의 보증'으로서의 성령의 인침은 말 그대로 믿는 자에게 성령이 도장을 찍듯 구원을 확증, 담보해 준다는 뜻이고, '복음 청취'에서 성령의 인침은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이 도장을 찍듯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이 두 견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구절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입니다. 이 구절은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의 인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단어들의 관계 설정 속에서 논거가 발생됩니다.
먼저 성령의 인침을 믿음의 결과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대표적인 신학자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로이드 존스(Lloyd R. Jones) 같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 입장을 취한 신학자는, 한국에 '성령세례와 개혁주의 성령론(THE SPIRIT OF PROMISE)'으로 잘 알려진 매크로우드(Donald Macleod) 교수입니다.
매크로우드 교수는 헬라어 시제의 특성상, 성령의 인침이 믿음의 결과도 아니고, 둘 사이에는 시간차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로이드 존스에 대한 그의 비판글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그 안에서 또한 믿어(after that ye believed)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1:13)'에서, '믿게 된 이후에'라는 구절의 동사가 과거시제로 되어있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 시제는 부정시제인데, 그는 부정 과거를 단순 과거로 너무 단순화시켰다. 헬라어의 시제들은 우선적으로 '행위의 시간'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고 '행위의 상태'와 관계가 있다. 부정 과거는 불명확한 행위를 지시하는 시제이다. ... 그것은 '완료 또는 계속과는 무관한, 단순한 행위'라고 쓰고 있다(THE SPIRIT OF PROMISE)."
우리는 매크로우드 박사의 견해를 지지하지만, 성령의 인침을 단지 '믿음'과의 관계에만 묶어두는 그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침을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라는 전체 문장과 연결 지웁니다. 곧 성령의 인침을 '구원의 복음을 듣는 것에서부터 믿음'까지 다 아우르게 하고, 성령의 인침이 복음을 듣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게 합니다.
개혁주의 목사 이장우 역시 성령의 인침(엡 1;13)은 믿은 후의 결과물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들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는 우리 인식의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 표현한 것이고, ... 오히려 성령이 임하여야만 복음을 듣고 믿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행위의 조건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논리적인 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롬 8:15, 갈 4:6)고 했으니, 주 안에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이 성령의 인친 증거이다."
믿음과 성령의 인침 사이에 시간차를 두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를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먼저 그것이 칭의 유보자들의 칭의 유예나, 제2의 축복(중생)으로 일컬어지는 웨슬리안 완전주의(John Wesley's Doctrine of Entire Sanctification) 등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섭니다. 만일 믿음과 인침 사이의 시간차를 인정하면 칭의 유보자들에게 믿음과 최종 칭의 사이의 시간차를 인정해 주고, 완전한 성화를 위해 믿음 외에 재중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에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크로우드 박사는 믿음과 성령의 인침 사이에 시간차를 인정하지 않으므로-의도한 것은 아니지만-칭의 유보자들과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이 치고 들어올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논리적으로 믿음은 칭의보다 우선적이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도 아니며 믿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인침 이전에 오는 것이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THE SPIRIT OF PROMISE)."
둘째 복음이 들려질 때, 성령의 인침이 있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많은 내용들이 복음을 들을 때부터 성령의 인침이 있음을 말합니다. 복음을 들을 때 마음이 열리고(행 16:14),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임재 하는 것은 성령의 인침의 결과이며(행 10:44), 예수를 주라 부르게 되고(고전 12:3),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도 다 성령이 인쳐진 결과입니다(롬 8:15, 갈 4:6).
개신대학원 설립자 이병규 박사도 '성령의 인침(엡 1:13)'이라는 그의 설교에서, 성령의 인침을 믿음을 갖게 하는 동인으로 말합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인을 치는가? 성령께서 말씀(예수 그리스도)을 믿어지게 하는 것이 인을 치는 것이다. 믿는 자는 십자가의 도가 심령 속에 도장 찍힌 것처럼 새겨져 있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을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 12:3)"는 그의 설교에서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값으로 영혼이 죽어 있었으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죽었던 영혼을 살려 놓았으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침을 복음이 믿어지게 하는 원인으로 이해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성령의 인침(역사)을 대부분 말씀의 증거와 연관지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5문'에도 "성령이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이 생기게 한다"고 했습니다. 곧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교도 목사 리콜라스 바이필드(Nicholas Byfield, 1579- 1622)는 설교를 들음으로 얻어지는 유익 10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님이 오시고(행 10:44), 약속의 성령에 의해 인침을 받고(엡 1:13), 성령이 교회들을 향하여 말씀(계 3:13)하신다(works of John Owen)."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의 인침이 있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사단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기 위해 사단이 가장 심혈을 쏟는 분야가 복음증거입니다. 구원에로의 부르심이 복음을 통해 이루어지기에(살후 2:14), 복음 증거를 훼방하면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사단이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복음을 듣는 데서 나지만(롬 10:17), 성령의 인침을 받지 못한 길가와 같은 마음에는, 말씀이 뿌려지는 즉시 사단이 뺏어 가버리므로(마 13:19)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자를 복음으로 부르실 때 성령의 인침을 주어 그에게 사단의 방해가 미치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 사도도 성령의 인침을 받지 못한 불신자의 마음에, 사단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했습니다(고후 4:3-4). 예수님이 자신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불신자들을 향해 성령을 거스리고(행 7:51) 성령이 없는 자(유 1:19) 라고 한 것은, 성령의 인침을 받지 못한 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는 결코 성령을 거역하거나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훼방은, 복음에 대한 인간의 영적 무지(마 13:13-15, 엡 4:18)와 결탁될 때 더욱 시너지 효과를 발휘합니다. 복음을 훼방하는 사단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영적 무지는, 막무가내로 사단에게 유린당합니다. 정작 복음의 영광에는 눈이 가려지고, 배설물 같은 하찮은 것들과 거짓된 것들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게 됩니다. 복음을 믿으려면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듯(행 9:18), 무지의 비늘이 벗겨져야 하며, 이는 오직 성령의 인침으로만 가능합니다(고전 2:10).
성령의 인침이 복음을 들을 때부터 있어야 할 마지막 당위성은, 루터가 말한 '믿음의 수동성'을 위해서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자원과 의지로 서려는 자립성과 자의성을 그 속성으로 하는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요 14:7) 임하면 이런 인간의 자의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여 루터의 '탑경험(Tunnerlebnis)', 어거스틴의 '톨레 레게(Tolle lege)' 경험 같은, '들려지고(be listened) 믿어지는(be believed)' 수동적 신앙이 구현되게 됩니다.
오늘 유보적 칭의론, 종교다원주의, 완전주의, 신비주의 같은 불건전한 신학 사상은, 성령의 인침이 없는 자의적인 믿음, 주관적인 성경 이해, 소위 '내가복음'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수동성은 본문에 등장하는 "그 안에서"라는 구도 속에서 더욱 강화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듣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는, 그리스도 의존의 강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존적인 수동적 신앙이, 바울이 말한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위에 세워진 믿음이고(고전 2:4-5), 이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진 믿음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냅니다(고전 2:4).
자의성을 벗어난 수동적인 신앙은 자신의 능력이나 한계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에 묶이지 않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불퇴전의 신앙용기를 드러냅니다. 오늘날 이런 성령의 인침이 있는 신앙인들이 양산되려면, "불이 불을 낳는다"는 레오나드 레이븐힐(Leonard Ravenhill)의 말처럼, 먼저 성령의 인침 있는 설교자들이 들불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