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게디는 에스겔 47:9~10 꿈이 이뤄지는 무대
믿음과 인내를 통해 기다림의 축복을 가져다준 엔게디 동굴
◈엔 게디로 가는 길(Ein Gadi)
마사다와 사해를 구경하고 사해 서쪽 해안을 타고 90번 도로를 타고 북상하다 보면 광야의 오아시스를 만난다. 마사다에서 북쪽으로 약 9.94마일(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엔게디에서 북쪽으로 23.8마일(38.4km) 계속 올라가면 사해 사본이 발견된 쿰란 지역이 나온다. 예루살렘은 이곳에서 북서쪽 광야로 올라가 드고아를 거치면 31마일(50km)이 되지만 광야로 옛날처럼 갈 수 없어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한다. 90번 도로와 1번 도로를 이용하면 사해와 유대 광야를 통과하여 예루살렘까지 54.4마일(87.6km)이 된다. 차로는 1시간 25분쯤 걸린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므로 마사다와 사해를 거쳐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서쪽으로 드고아-베들레헴-예루살렘으로 나가는 길목이며 남북으로 아라바 광야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고. 사해 동편 모암 지역에서도 이곳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갔기 때문에 중요한 통과로였다. 구약 창세기 14:7에 ‘하사손 다말‘이라고 묘사된 지역이고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사해 연변의 중요한 도시였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할 때와 관련된 곳이기도 하다.
여호수아 정복전쟁 후에는 유다족속의 기업이었다.(수15:52) 유다 왕 여호사밧 때 모암과 암몬의 침략 거점이기도 하였다.(대하0:1~6) 폐르시아 시대에 큰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고, 로마시대에는 왕실의 소유로 중요한 향료를 재배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성벽을 갖춘 도시의 면모도 있고, 주후 1~2세기 엣세네 파의 또 다른 거주지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오아시스는 유대전쟁시 파괴되어 버려졌고, 1848년 최초 발굴과 더불어 1960년에 히브리대학의 마잘 교수에 의하여 발굴이 완료되었다. 이스라엘 왕실의 이름이 적힌 항아리, 제단, 제의용구들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시가서에서 말하는 엔게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멜화 송이로구나(아가1:14)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시 무대였던 엔게디는 사해 서쪽 중간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사해의 푸른 물이 동편으로 펼쳐지고, 마온 황무지, 십 광야, 유대광야가 서편으로 둘러싸고 있는 메마른 곳이다. 하사손 다말이라는 고대 이름을 보건대 ‘하사손’-자르다, ‘다말’- 종려나무 이곳은 4개의 샘이 모여져 만들어진 오아시스로 1년 300만 리터에 달하는 풍부한 수량으로 식물 900종, 새 200종이 모여 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깊고 깊은 골짜기가 10군데에 이르고 광야에 발을 잘못 들여 놓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실제로 엔게디 뒤편 계곡에서 광야 투어 중이던 미국 여학생들이 조난당하여 6명이 사망하기도 하였고, 필자도 2002년경에 한국인 5명과 함께 광야탐사에 나섰다가 조난당하여 거의 아사 직전까지 간 경험이 있다. 길을 잃고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엔게디에서 고난을 받다
얼마나 계곡이 깊고 험한지 아침 10시에 들어가서 새벽 1시에 엔게디 키브츠 쪽으로 간신히 내려왔다. 그때 필자는 무릎이 아파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으며, 가지고 간 물과 음식물이 다 떨어져서 갈증 속에서 입이 불에 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한번만 살려달라고. 생애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간절하고 가장 긴 기도를 드렸던 순간순간이었다.
필자는 엔게디에 올 때마다 그때 일이 떠오르면서 다윗이 생각났다. 골리앗과의 싸움 이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사위가 되면서 승승장구 백성들의 환영 속에 혜성같이 떠올랐던 다윗,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장래의 왕으로 세워지지만 그는 사울의 미움을 받아 광야에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다윗과 엔게디
만만의 사나이가 절망의 사나이가 되어 광야로 쫓겨 다니는 아픔을 겪게 된 것이다. 엔게디 폭포가 보이는 광야학교 잔디밭에서 광야를 바라보면 다윗의 인내가 생각난다. 얼마나 외롭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이 상황을 끝낼 기회가 바로 엔게디 동굴에서 일어났다. 사울이 다윗이 숨은 굴로 들어왔고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은 광야의 목마름을 끝낼 기회를 잡은 것이다. 참 이상도 하지 왜 그날 사울은 3천 군사나 데리고 왔는데 다윗이 숨은 굴을 먼저 군사들이 수색하지 않고 사울 혼자 했는가 말이다? 물론 급한 일처리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왕이고 또 원수를 찾아나선 길인데 음침한 동굴로 들어가면서 먼저 휘하 장수들이 수색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다윗은 결국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확증한다. 왕도 하나님이 세우셔야지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의 숨은 굴로 들어왔을 때 뛸듯이 기뻐한 것은 다윗의 추종자들이다. 이들 눈에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는 것이다. 3천 군사는 밖에 있고 사울 혼자인데 그의 목을 치면, 이제 광야를 떠도는 비참한 인생이 끝장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의 뜻임을 주장하였다. 눈에 보이는 기회에 철저히 영의 눈이 가려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기다렸다. 진정한 하나님이 세워주심을 바라면서(삼상23장) 평범한 사람은 한치 앞밖에 못 본다. 그러나 신앙으로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멀리, 높이, 깊게 본다. 다윗은 기다림을 통하여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다윗도 인간인데 어찌 광야의 도주가 힘들지 않겠는가, 또 도와주고 믿어준 추종자들의 권고도 무시할 수가 없었을 것이며, 누가 보더라도 이 같은 황금의 기회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인 것이다.
◈절호의 기회
한번만 마음 모질게 먹으면 광야의 굶주림과 멸시도, 도망다님도 끝나고 사울을 죽인 후 기브아 왕궁으로 가서 왕 노릇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역시 사람의 생각대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다.
과연 이 기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또다른 시험인가? 순간 수많은 갈등과 망설임이 있었겠지만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 이 상황을 맡기고 너그럽게 사울을 보내준다.
주께서는 이 행위를 기쁘게 받으신 것 같다. 그렇다. 지금 어렵더라도 조금만 참아보자. 서두르지 말고 주께서 주시는 완벽한 기회를 기대해보자. 다윗이 처한 형편이 우리보다는 더 어려웠음을 기억하자.
결국 사울은 요나단과 더불어 불레셋과의 전투현장인 길보아산에서 죽게 된다.(삼상31:4)
엔게디에서 북쪽으로 100km 이상 올라가야 길보아산이 나온다. 사울의 사후 다윗의 부하들과 사울의 부하들 사이에 싸움이 지속되었지만 결국 다윗에게로 전세가 기운 것은 다윗의 기다림의 축복이었다.
◈엔게디와 시편23편
광야의 오아시스(수15:26) 답게, 지금도 엔게디 폭포에서는 신기한 물줄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물이 떨어지는 언덕 너머에는 물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전형적인 광야인데 말이다. 그리고 대추야자 열매가 자라고, 엔게디라는 상표를 가진 생수공장이 있어 생수를 생산하기도 한다. 공원 입구에서 40분 정도 걸어가면 폭포를 만난다. 시간이 허락하면 폭포수에 물을 담그고 시편23편을 외워봄도 좋다.
다윗이 걸어가던 길 어디에 푸른 초장이, 쉴만한 물가가 있었던가? 광야는 괴롭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그 장소를 발견하였다. 바로 이곳 엔게디에 와서야 그는 비로소 시편 23편을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시편23편이 이곳에서의 체험을 통해 다윗이 기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시편23편은 엄청나게 좋은 환경에서 기록되어진 것이 아니라 고통과 목마름의 현장인 광야에서 기록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시편23편은 더욱 빛을 발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가 광야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 비록 열약해도 주께서 함께 하시면 바로 그곳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될 것이다. 광야의 꿈은 푸른 초장이다. 그것은 주의 은혜 안에서만 이루어짐을 오늘도 엔게디 “산양의 샘”에서 나는 느낀다.
◈에스겔의 환상과 엔게디
유다 마지막 시대에 바벨론에 의해 2차로 나이 25세에 그발 강가 텔아빕으로 끌려갔던 에스겔은 3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선지자의 길을 걷게 된다. 에스겔은 망해가는 조국의 모습을 포로지에서 바라보며 얼마나 많이 아파하고 힘들어했는지 모른다. 에스겔은 유대 포로민들에게 예루살렘의 최후를 선포하면서 아프고 힘들지만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 일어나는 환상을 선포하였다.(겔37:1~10)
에스겔은 37장25절에서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고 선포하며 우상과 가증한 것을 버리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에스겔의 생기 비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미래 성전 곧 교회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 중심 무대는 성전이지만 그 무대의 주인공은 다윗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성전에서 흐르는 물이 동쪽으로 흘러서 아라바로 내려간다고 하였다.(47:8) 내려간 물은 사해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사해가 되살아나리라고 한다. 고기가 없는 사해에 물고기가 생기고 어부가 설 것이라고 한다.(47:10) 진펄과 개펄은 소금땅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엔게디 샘가에는 열매가 끊이지 않겠다 하였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엔게디를 통과한 후 사해에 들어가서 생해로 만들겠다는 놀라운 환상이다. 바로 엔게디는 환상이 실현되는 복된 곳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정통유대인 청년들에게 예수의 꿈을 노래로 전하였다. 엔게디는 에스겔 47:9~10절의 꿈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될 것임을 또한 믿는다.